(워싱턴=연합뉴스) 백나리 특파원 = 1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날이 생생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연설이 끝나고 지지자들이 행진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한 시간 뒤면 의회 유리창이 박살 나고 중앙홀에 총성이 울리게 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흥분한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넘어 의사당으로 돌진할 때까지도 폭동 수준의 아비규환 사태가 임박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미 언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심상찮은 움직임을 지켜보면서도 민주주의의 보루를 자처해온 미국에서 의회난입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않았을 겁니다.
속보를 보내면서도 믿기 어려웠던 4시간이었습니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갖은 기행으로 예측불가의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의회난입은 차원이 다른 얘기였습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가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쿠데타 시도를 취재해왔는데 지금 나는 결국 미국의 쿠데타를 취재하고 있다"고 트윗으로 탄식했을 때 의회난입을 바라보는 미국 국민의 충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서 지난 6일(현지시간). 폭도들이 짓밟았던 현장에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섰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단호해 보였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면서 민주주의 수호 의지를 다졌습니다.
연설엔 트럼프 전 대통령도 16차례나 등장했습니다. 비록 '트럼프'라는 이름 자체를 거론하지는 않고 '패배한 전직 대통령' 같은 표현을 썼지만 의회난입의 책임이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있음을 분명히 한 겁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웬만해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괜히 트럼프 전 대통령을 자극해 존재감을 불어넣어 주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달랐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을 대놓고 직격해야 한다는 민주당 내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대선 조작을 주장해온 트럼프 전 대통령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바이든 대통령 연설 직후 성명을 내더니 제정신이 아닌 정책으로 미국을 파괴하고 있다며 노골적인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6일 나란히 열겠다던 기자회견을 취소했지만 15일 애리조나주 유세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향해 맹공을 퍼부을 태세입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기세등등한 행보에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말 나온 한 여론조사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정당하게 선출됐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공화당을 지지하는 응답자 중 무려 71%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공화당 지지자 80%는 의회난입을 폭동이 아닌 항의로 규정했습니다.
의회난입 사태 후 1년이 지났지만 미국의 분열상이 여전히 극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의회난입 2주 뒤 열린 취임식에서 통합을 기치로 내걸고 1년을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현주소는 여전히 분열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의회난입 1년을 맞는 소회에 씁쓸함이 빠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nar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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