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카자흐 사태, 푸틴 대통령에 난관인 동시에 기회"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최대 산유국인 카자흐스탄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 사태 진압에 한 손을 거들면서 옛 소련권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거듭 과시하고 있다.
러시아는 옛 소련권 안보 협의체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를 통해 이달 6일 2천500명 규모의 평화유지군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했다.
카자흐스탄에선 차량용 액화천연가스(LPG) 가격 급등을 계기로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극심한 양극화와 부정부패에 분노한 시민이 새해 벽두부터 거리로 뛰쳐나왔는데, 이들을 외면하고 집권 세력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결국 이번 시위는 9일(현지시간) 기준으로 164명이 숨지는 등 대규모 사상자를 낸 채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10일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카자흐스탄 시위 사태에 개입함으로써 역내 주요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할 기회를 잡았다고 보고 있다.
CSTO의 힘을 빌려 국민의 정권교체 목소리를 누른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현 집권세력의 입장에선 러시아에 상당한 빚을 지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미국 싱크탱크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폴 스트론스키 선임연구원은 "토카예프 정부가 안정을 회복하고 권력을 유지한다면 러시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영원히 간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카자흐스탄의 주권을 약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가뜩이나 푸틴 대통령은 2014년 카자흐스탄에 대해 "국가 지위를 가졌던 적이 없다"면서 독립국가 지위에 의문을 제기해 논란을 빚은 전력이 있다고 WSJ는 전했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도 "푸틴 대통령에게 (카자흐스탄) 위기는 난관인 동시에 기회"라고 진단했다.
카자흐스탄 시위가 장기집권 중인 현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20여 년간 장기집권 중인 푸틴 대통령 입장에서 간과하기 힘든 사안이다.
러시아 정치 애널리스트 아바스 갈랴모프는 "일반적으로 그(푸틴)는 지배자에 반하는 모든 민중봉기에 민감하다"고 말했다.
CSTO가 병력을 파견한 것은 이번이 첫 사례다. 더구나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국내 봉기를 억압하기 위해 병력이 파견됐다는 점에서 적잖은 의미를 갖는다.
일부 전문가는 이러한 상황이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서방과 벼랑 끝 전술을 펼쳐 온 푸틴 대통령에게 추가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봤다.
모스크바 카네기 센터의 알렉산더 바우노프 연구원은 "향후 미·러 회담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만이 유일한 주제가 아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푸틴 대통령 입장에선 핵심 외교전선에서 집중하기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반면, 카자흐스탄의 소요사태가 옛 소련권의 안정을 위한 러시아의 역할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여지가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 싱크탱크 외교정책연구소(FPRI)의 중앙아시아 연구원 막시밀리안 헤스는 10일 제네바에서 열리는 우크라이나 문제 관련 미·러 회담에서 러시아 측이 보란 듯이 '이게 바로 옛 소련권 역내 안보에서 러시아가 특별 지위를 가져야 할 이유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이 급증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실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지정학적 대재난'이었다고 보는 푸틴 대통령은 지난 수년간 꾸준히 옛 소련권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해 왔다.
2008년에는 친서방 정책을 펴는 조지아(러시아명 그루지야)와 전쟁을 벌였고,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병합했다.
벨라루스에선 장기집권으로 국민의 반발을 산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을 지원하면서 연맹국 창설을 위한 로드맵에 합의했으며, 키르기스스탄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지에도 여러 방식으로 영향력을 투사하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CSTO의 카자흐스탄 평화유지군 파견과 관련해 "최근 역사의 교훈은 일단 러시아인들이 집에 들어오면 떠나게 하기가 때때로 매우 어렵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러시아 외교부는 성명을 통해 "미국인들을 집에 들어오게 하면 강도질이나 능욕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울 수 있다"고 반박했다.
hwangc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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