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탄 시신 35구' 희생자 아내 인터뷰…"짐승보다 못한 만행 잊지않을 것"
"미얀마군 피해 동굴로, 깊은 산속으로 도망…우기엔 비, 겨울엔 추위 고통"
"무섭게 오른 물가로 양육이 가장 걱정…20일간 산속서 구호품만 기다리기도"
(양곤[미얀마]=연합뉴스) 이정호 통신원 = "미얀마군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도망치지만, 우기에는 비 때문에, 지금 같은 겨울이면 아무것도 가릴 게 없어 추위에 고통이 심합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 고생이 말도 못 합니다."
오는 2월 1일이면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지 1년이 된다.
이 기간 미얀마 군부의 무자비한 탄압에 목숨을 잃은 사람만 1천500명에 육박했다.
특히 동부 카야주는 소수민족 무장단체 및 시민방위군(PDF)이 미얀마군과 벌이는 전투가 유난히 치열한 곳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는 카야주에서 땅콩을 재배하고 쌀농사를 지으며 행복하게 살다가 쿠데타 1년 동안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렸다는 가정주부 안젤라(가명·27) 씨를 텔레그램과 이메일을 통해 만났다.
안젤라 씨가 미얀마어를 못 해, 카야어 통역과 미얀마어 통역 두 단계를 거쳐 인터뷰가 진행됐다.
그녀는 특히 지난해 말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던 '불탄 시신 35구'의 희생자 중 한 명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했다.
당시 상황을 전하면서 북받쳐 오르는 슬픔에 이미 말라버렸을 법도 한 눈물을 그녀는 또다시 쏟아냈다.
안젤라 씨는 "남편이 산 채로 묶여 불타 죽었다는 걸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면서 "아이들이 자꾸 우리 아빠는 왜 오지 않느냐고 묻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편은 시민방위군(PDF)도 아니고, 소수민족 무장단체 소속도 아닌 평범한 농부"라며 "군부가 일반 시민을 상대로 짐승보다 더 잔인하고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걸 평생 잊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젤라 씨는 쿠데타 1년 이후 겪은 가장 큰 어려움으로 살인적으로 오른 물가를 꼽았다.
그는 "물가가 너무 올라 이제는 열심히 일해도 하루에 한 끼를 먹기도 너무 힘들다. 특히 자라나는 두 아이 양육이 앞으로 큰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엔 20일 넘게 깊은 산 속 여기저기를 쫓겨 다니면서 생활했는데 먹을 게 거의 없어서 구호품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겨우 참았다"고 말했다.
안젤라 씨는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이런 처참 하고 잔인한 일들을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는 모르는 것인가. 누구도 도와줄 수가 없는 것인가"라며 국제사회의 관심과 도움을 촉구했다.
다음은 안젤라 씨와의 일문일답.
(※ 안젤라 씨는 자신의 인터뷰 동영상은 물론 아이들의 사진도 함께 보내줬지만, 아이들의 안전을 우려해 싣지 않았다)
-- 본인을 소개해달라.
▲ 미얀마 카야주에 사는 올해 27세 가정주부 안젤라다.
남편 르위 지(가명·38)와의 사이에 6살, 4살짜리 두 아들이 있다.
땅콩을 재배하고 쌀농사를 지으면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 쿠데타 1년이 다 됐다. 가장 힘든 건 무엇이었나.
▲ 성당에 갈 수 없게 된 점이었다.
성당은 쿠데타 이후 피란민들을 위한 캠프로 이용됐는데, 군인들이 포를 쏘고 비행기를 이용해 폭탄을 떨어뜨려서 다 부숴버렸다.
또 쿠데타 이후로 물가가 계속 너무 올라서 이제는 열심히 일해도 하루에 한 끼를 먹기도 너무 힘들다.
특히 자라나는 두 아이 양육이 앞으로 큰 걱정이다.
이번에는 20일이 넘게 깊은 산 속 여기저기를 쫓겨 다니면서 생활했는데 먹을 게 거의 없어서 구호 물품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겨우 참았다.
--쿠데타 이후로 농사일은 어떻게 했었나.
▲ 쿠데타 이후로는 집 근처의 논이나 밭도 편하게 갈 수 없었다.
논이나 밭에 일하러 갈 때는 우리 부부만 갔는데, 쿠데타 이후로는 일하다가도 근처에서 총소리가 들리면 애들이 걱정돼 집으로 뛰쳐들어가는 일을 수없이 반복했다.
쿠데타로 농사일도 마음 놓고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지거나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올 땐 어떻게 했나.
▲ 처음에는 집에 가만히 있었는데 군인들이 집마다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리고, 약탈하고, 사람을 잡아가고 그랬다.
그래서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오면 마을 사람들끼리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이후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오겠다 싶으면 미리 알아놓은 동굴로 도망친다. 그들이 물러갈 때까지 10일이고, 15일이고 숨어서 지내다가 돌아오곤 하는 생활을 몇 개월째 반복하고 있다.
-- 동굴 생활은 어떤가.
▲ 군인들이 동굴까지는 오지 않아서 안전하긴 하다. 그러나 발각될까 봐 불을 밝힐 수가 없으니 동굴 안이 너무 어둡다.
동굴 안을 돌아다니다가 넘어지면서 손이 부러지기도 하고, 다친 사람이 많다.
다만 동굴 안에는 먹을 물이 없다. 그래서 다시 산 밑으로 물을 구하러 나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다가 발각되면 잡혀간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 동굴 이외의 곳으로 도망칠 때도 있나.
▲ 미얀마군의 공격이 심해지면 만일에 대비해 더 깊은 산 속으로 피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1년간 동굴에서도 나와 더 깊은 산 속으로 피한 경우는 이번까지 3차례 있었다.
깊은 산 속으로 피하게 되면, 우기 때는 비 피해서 밥해 먹고 잠잘 곳을 찾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처럼 건기에는 겨울이어서 아무것도 가릴 것 없는 깊은 산 속에서 자야 하니 추위에 고통이 심하다. 특히 어린 아이들의 고생은 말도 못 한다.
산속 깊이 들어가면 인터넷은 말할 것도 없고, 전화도 불통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을에 있는 집들은 아직 성한가.
▲ 우리 마을은 싸움이 많이 일어나는 프루소구(區)와 가까워서 포탄이 자주 떨어진다.
우리 집도 포탄에 맞아서 문도, 창문도 깨지고 벽도 무너졌다.
이 책임을 군부의 국가행정평의회(SAC)에 물어야 할지, 민주진영인 국민통합정부(NUG)에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 이번에 큰일을 당했다고 들었다.
▲ 지난해 12월 24일 오전 8시쯤 남편이 애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러 나갔다. 그리고 전날 두고 왔다며 밭으로 칼을 찾으러 갔다.
그런데 한 시간 뒤부터 총소리가 들리고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유치원에서 애들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런데 밭으로 가는 길 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서 무서워 밭에 있을 남편한테는 가볼 수가 없었다.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왔을 때도 도망가지 못하고 계속 남편을 기다리다가 저녁때 군인들이 마을 밖으로 나간 틈을 타서 옷가지만 챙겨 두 아이와 동굴로 피신했다.
동굴에서도 마을 사람들에게 남편을 수소문했으나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했고, 애들은 아빠를 기다리면서 밤새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다음날 군인들이 마을 주민들을 묶어놓고 불태워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중에 남편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아이들만 없었다면 나도 가서 죽여달라고 하고 싶었다.
미얀마 군인들은 이 세상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다.
그이가 산 채로 묶여서 불태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난민 캠프에 살았는데 다른 아버지들은 밤이면 애들을 보러온다.
아이들은 자꾸 우리 아빠는 왜 오지 않느냐고 묻는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남편은 시민방위군(PDF)도 아니고, 소수민족 무장단체 소속도 아니다. 평범한 농부다.
군부가 일반 시민을 상대로 짐승보다 더 잔인하고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잊지 않을 것이다.
또 남편이 숨진 뒤 거의 3주 만에 집으로 돌아가 봤는데 또 부서져 있고 가재도구들은 흩어져 엉망이었다.
우리 집에는 더 가져갈 것도 없는데 미얀마 군인들은 매번 올 때마다 왜 이렇게 부수고 약탈을 하는 것인가.
여기,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처참하고 잔인한 일들을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는 모르고 있는 것인가. 누구도 도와줄 수가 없는 것인가.
가난했지만 열심히 일하고 가족과 재미있게 지내는 우리를,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를 미얀마군은 왜 이렇게 잔인하게 대하고 못살게 구는 것인가.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내가 왜,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불운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겪어야 할까.
2021340@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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