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 1천500명 넘어…'미얀마군의 날' 하루에만 약 100명 숨지기도
유혈 탄압 계속되자 시민 무장투쟁…군부 강경 진압 악순환
(방콕=연합뉴스) 김남권 특파원 = 1일로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지 꼭 1년이 됐습니다.
태국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 정치범지원협회(AAPP)에 따르면 이 기간 군부의 유혈 탄압으로 미얀마 전역에서 숨진 이는 1천500명이 넘었습니다.
쿠데타 뒤 1년 간 미얀마는 국민의 피로 얼룩졌습니다.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이 이끄는 군부는 지난해 2월1일 장갑차와 탱크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2020년 11월 총선이 부정선거였지만 정부가 이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을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군부는 동도 트기 전 의사당 등 주요 기관을 장악했습니다.
동시에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을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들을 구금했습니다.
군부의 급습에 시민들은 충격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쿠데타 다음날인 2일 밤 최대 도시 양곤을 비롯해 일부 지역에서 냄비 등을 두드리는 '소음 시위'가 시작됐습니다. 악마를 쫓아낸다는 의미입니다.
쿠데타 나흘째인 4일 제2 도시 만달레이에서 첫 거리 시위가 벌어집니다.
이후 반군부 거리 시위 불길은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집니다.
군정이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인터넷을 차단했지만, 성난 민심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2월22일 열린 이른바 '22222' 총파업 시위는 전역에서 수백만 명이 참여해 말 그대로 사람이 강을 이뤘습니다.
월급을 안 받아도 좋으니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일하지 않겠다는 시민불복종운동(CDM)이 의료계를 시작으로 은행권과 교육계, 철도, 항만 업계로 이어졌습니다.
예상외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군부는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국민을 향해 막무가내로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2월 9일 수도 네피도 시위 현장에서 20살 먀 뚜웨 뚜웨 카인이 머리에 실탄을 맞고 사경을 헤매다 열흘 만에 숨졌습니다.
3월 초에는 만달레이에서 시위하다 총탄에 맞아 19세 소녀 치알 신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망할 당시 입고 있던 티셔츠에 새겨진 문구'다 잘 될 거야'(Everything will be OK)는 시위대에 승리를 향한 힘을 불어넣는 메시지가 됐습니다.
최대 도시 양곤 도로 위에서 노란색 헬멧을 쓴 시민이 바닥에 쓰러져 있고, 동료가 그의 옷깃을 붙잡고 마치 "일어나"라고 말하는 듯 울먹이는 사진은 많은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북부 미치나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수녀원 소속 안 누 따웅 수녀는 군경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유와 인권을 요구하는 민간인에게 총을 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따웅 수녀의 모습은 미얀마의 엄혹한 상황을 어떤 글보다 더 강하게 웅변했습니다.
하지만 군부는 총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얀마군의 날'인 3월 27일 반군부 시위대를 향해 또다시 총을 난사했습니다.
하루에만 100명 안팎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됐습니다.
민주진영은 '군부 수치의 날'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국제사회 비판에도 꿈쩍 않던 흘라잉 최고 사령관은 미얀마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4월24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정상들은 폭력 즉각 중단과 당사자 간 대화 시작 등 5개 항에 합의했지만, 군정에는 휴짓조각이었습니다.
쿠데타 당일 가택연금 됐던 수치 국가고문은 5월 처음으로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에게 군부는 선거법 위반과 뇌물죄, 코로나19 방역 조치 위반 등 10여개 혐의를 덮어씌웠습니다.
이미 징역 6년형이 선고된 수치 고문에게는 최대 징역 100년형 이상이 선고될 수도 있습니다.
평화 시위가 총탄으로 되돌아오고, 민주 진영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기만 하자 미얀마 국민은 무장 투쟁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소수민족 무장단체가 통제하는 국경 지역으로 피신해 군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후 이들은 시민방위군(PDF)이라는 이름으로 무장 투쟁을 벌여오고 있습니다.
최대 도시 양곤의 도심에서부터 서부 친주 민닷의 오지 도로에서까지 PDF는 군부를 향해 총을 쏘거나 지뢰 또는 폭발물을 터뜨리며 저항했습니다.
이는 같은 해 9월 민주진영 임시정부의 '전쟁 선포'까지로 이어졌습니다.
쿠데타로 힘든 삶을 살던 미얀마인들은 7월 코로나19 3차 대유행이 확산하면서 또 한 번의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쿠데타로 공공보건이 사실상 붕괴하다시피 하면서, 코로나19에 감염된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집에서 산소통에 의지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이마저도 군부가 산소통의 일반 판매를 금지하면서, 시민들은 산소공장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분통을 터뜨려야 했습니다.
반군부 무장투쟁이 강화하고 이 과정에서 병력 및 물자의 손실을 보는 일이 빈번해지자 군부는 공세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포 공격은 물론 항공기를 이용한 공습도 빈번해졌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법했던 장면도 목격됐습니다.
군인들이 민간인을 '인간방패'로 앞세워 행진하는 것인데, 자신들에 대한 PDF의 공격을 막기 위한 행동입니다.
급기야는 성탄절 전날인 지난해 12월24일 동부 카야주 프루소구 모소 마을에서는 아동과 청소년 4명을 포함해 최소 35구의 불에 탄 시신이 발견돼 전 세계에 충격을 줬습니다.
부검에 참여한 의사는 시신 중 일부는 손이 등 뒤로 묶여있었거나 입에 재갈이 물린 상태였으며 가슴과 폐에 천공이 난 시신도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중 남편이 있었던 안젤라(가명·27)씨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시민방위군(PDF)도 아니고, 소수민족 무장단체 소속도 아닙니다. 평범한 농부일 뿐입니다. 군부가 일반 시민을 상대로 짐승보다 더 잔인하고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잊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1년간 국제사회는 쿠데타 사태 해결에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다 아세안 의장국인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가 올 초 미얀마를 방문, 흘라잉 사령관과 악수하면서 국제사회에 대한 미얀마인들의 의구심은 더 커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군부의 '돈 줄' 역할을 하는 원유·가스전 사업에 참여 중인 프랑스와 미국, 호주의 거대 에너지 기업 토탈, 셰브런, 우드사이드가 지난달 말 각각 미얀마 철수 방침을 밝혔습니다.
군부의 행태에 변화를 미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다만 국제사회에 '쿠데타 1년이 지났는데, 마냥 손 놓고 기다려서는 안된다'라는 메시지가 되는 게 아니냐는 기대 섞인 해석도 일각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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