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손모빌·셰브런, 7년 만에 최대 실적…주가도 최대 80%↑
급격한 탄소중립 정책으로 되레 수혜…체질개선 노력도 한몫
(서울=연합뉴스) 정열 기자 =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주요국의 친환경 정책 등의 영향으로 궁지에 몰렸던 거대 석유기업들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급격한 탄소중립 정책 추진 등의 부작용으로 화석연료 가격이 급등하면서 수익성이 크게 개선됐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 각국의 친환경 정책 추진에 따라 사양산업 취급을 받던 거대 석유기업들이 수년 만에 최고 실적을 내면서 주가가 폭등하고 있는 현상이 아이러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 '미운 오리 새끼' 취급받던 석유 메이저의 화려한 부활
3일(이하 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에 따르면 세계 최대 석유기업인 엑손모빌은 지난해 230억 달러(약 27조7천억 원)의 순이익을 올리면서 2014년 이후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유가 급등세가 가팔라진 4분기에만 89억 달러의 순익을 거뒀다.
셰브런도 지난해 7년 만에 최고치인 156억 달러(약 18조7천억 원)의 순익을 기록했다.
두 회사를 합쳐 386억 달러의 순익을 기록했는데, 이는 양사가 전년도에 유가 하락과 석유 수요 감소로 276억 달러의 손실을 냈던 것과 대비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계 석유 메이저인 셸과 BP도 조만간 전년도에 비해 크게 개선된 실적을 발표할 것으로 전망했다.
엑손모빌이 시장 예상치를 뛰어넘는 지난해 실적을 발표한 지난 1일 이 회사의 주가는 전날보다 6% 넘게 폭등해 주당 80달러를 돌파했다. 엑손모빌의 1년 전 주가는 40달러대 중반이었다.
1년 전 88달러대였던 셰브런 주가도 2일 기준 135달러를 넘어섰다.
지난 1년간 엑손모빌의 주가는 약 80%, 셰브런은 56% 급등했고, 같은 기간 셸과 BP의 주가 상승률은 각각 39%, 43%였다고 WSJ은 전했다.
올해 들어서도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우려로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주가가 폭락한 것과 대조적으로 엑손모빌 등 석유기업 주가는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WSJ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금까지 S&P 500 에너지 부문 주가는 약 23% 상승했다. 같은 기간 S&P 500 전체 주가가 5%가량 하락한 것과 대조된다.
엑손모빌을 비롯한 석유 메이저들의 실적이 이처럼 큰 폭으로 개선된 것은 국제유가가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배럴당 50달러대 중반이던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의 가격은 지난해 10월 80달러를 돌파했고, 지난 3일에는 3월 인도분 가격이 90달러를 넘어섰다.
WTI 가격이 배럴당 90달러를 넘어선 것은 2014년 10월 이후 처음이다.
같은 날 브렌트유 가격은 배럴당 91.26달러까지 올랐다.
전문가들은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미국 자산운용사 어게인자산운용의 존 킬더프는 "2월 OPEC+ 회의가 마무리되고 최근 경제 지표가 부진하면서 원유를 매도하려는 참가자들이 일부 있었지만, 달러화의 약세가 매도세에 제동을 걸었다"며 "유가는 결국 배럴당 100달러대로 상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라이스타드 에너지의 수석 석유시장 분석가인 루이스 딕슨은 "단기, 장기적으로 모두 실질적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시장은 유가 강세를 점치고 있다"고 말했다.
◇ 친환경 정책의 역설…에너지 대란으로 석유기업 수혜
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그 중심에 세계 각국의 탄소중립 정책이 있다.
탄소중립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 만큼 이를 흡수해 실질적인 배출량을 '0'으로 만든다는 개념이다.
지난해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렸던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참가국들이 채택한 '글래스고 기후 조약'의 골자도 이산화탄소를 다량 배출하는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 중국 등 주요 경제권이 앞장서 추진한 탄소 저감 정책은 뜻밖의 부작용을 초래했다.
아직 발전의 효율성과 안정성이 취약한 신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을 성급하게 추진했다가 중국과 영국 등의 국가에서는 전력 대란이 발생했고 이는 화석연료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영국에서는 여름에 바람이 불지 않아 북해에 설치한 풍력발전이 무력화됐고, 중국에서는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석탄 화력발전 비중을 대폭 낮추려다가 대규모 전력난이 빚어졌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 의존도가 높은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지정학적 불안까지 더해지면서 천연가스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결국 세계적인 에너지 대란이 벌어지면서 궁지에 몰려있던 거대 석유기업들에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2020년 8월 엑손모빌이 뉴욕 증권시장을 대표하는 다우존스30 산업평균지수에서 제외될 때만 해도 오랫동안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했던 거대 석유기업의 쇠락은 약속된 일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다.
특히 지난해 1월 미국의 정권교체로 기후변화 대응을 중시하는 민주당의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엑손모빌과 같은 거대 석유기업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엑손모빌은 2011년까지만 해도 시가총액 기준 세계 최대 기업이었지만 세계적인 산업구조 변화에 따라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애플 등 빅테크 기업에 그 자리를 내줬다.
2007년 5천250억 달러에 달했던 엑손모빌의 시가총액은 2020년 8월 1천800억 달러까지 줄었다가 4일 현재 주가 반등의 영향으로 3천373억 달러까지 회복했다.
거대 석유기업들이 시대 변화에 따라 전통적인 석유사업 외에 다양한 친환경 사업에도 적잖은 투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엑손모빌의 경우 탄소 포집과 저장, 바이오연료, 수소 등 저탄소 사업 부문에 150억 달러(약 18조 원)를 투자할 방침이다.
국내에서도 최대 정유회사인 SK이노베이션이 차세대 친환경 사업으로 평가받는 배터리 사업의 매출 비중을 점차 높여가는 중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석유기업의 실적은 경기 사이클에 따라 등락을 반복하기 때문에 일시적 현상만으로 미래를 예측하기는 어렵다"면서도 "최근 석유산업이 과도하게 저평가된 측면이 있었고 기업들도 체질을 개선하고 있기 때문에 미래 성장성이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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