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년 역사중 박물관 10%가 나치 강제노역 12년에 할애
강제노역 현장 직접 체험…피해자 육성 증언 일일이 기록
(고슬라[독일]=연합뉴스) 이율 특파원 = 기차를 타고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서쪽으로 3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고슬라 역에서 버스로 갈아타 20여분간 비탈길을 타고 오른 뒤에야 람멜스베르크 광산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 광산은 세계 최장인 1천년 채굴의 역사로 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고려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서기 968년부터 은과 아연, 납, 구리가 채굴됐던 광산은 1988년 폐광된 뒤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연 10만명이 찾는 박물관과 체험형 견학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 광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된 이유 중 하나는 전쟁 중 강제 노역의 비참한 현장과 자료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서다. 세계문화유산의 자격 중 하나인 완전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한 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유럽 점령국에서 징발된 노동자들이 머나먼 이곳 독일의 광산으로 끌려와 강제노역을 당해야 했다.
7일(현지시간) 이곳을 찾아 박물관 관람과 함께 체험형 견학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아이와 함께 온 가족 관람객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독일 정부는 후세에도 명징하게 역사를 기억하라는 듯 강제노역의 현장인 이 광산을 고스란히 보존해 공개하고 있다.
견학 프로그램이 시작된 곳은 광부들이 고된 일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탈의실이었다.
족히 5m는 돼 보이는 높이의 탈의실 천장에 광부들의 작업복과 헬멧이 가득 걸려 있었다. 옷걸이 구실을 하는 철망이 오르내릴 수 있는 구조다.
광부의 작업복과 헬멧이 천장 높이 내걸린 이유를 묻자 견학 안내원은 "일하다 흘린 땀을 말리기 위해서다"고 답했다.
탈의실이 있는 건물을 비롯해 폐광 직전까지 람멜스베르크 광산의 주요 건물들은 1933년 나치가 집권한 뒤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이들 건물은 현재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안내원은 15명의 견학 참가자를 노란색 갱내운반용 궤도를 따라 30여 년 전까지 광부들이 일하던 500m 지하로 인도했다.
4량짜리 갱도 수송 열차에 삼삼오오 올라타자 '따르릉'하는 출발 신호가 울렸고 이내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강제노역이 벌어진 80년 전으로 시간까지 이동하는 듯했다.
5분여간의 암흑 속 여정 끝에 지하 500m에 도착했다. 헬멧을 쓰고 두꺼운 코트를 걸쳤는데도 지하공간 특유의 스산한 기운과 차가운 공기,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로 오돌오돌 떨어야 했다.
동행한 독일 아이들은 처음 경험하는 음습한 지하 공간에 겁에 질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모 곁으로 더 바짝 몸을 붙였다.
안내자는 일행을 이끌고 광부들이 말 그대로 '막장'같은 이 지하 공간에서 어떻게 구멍을 뚫고, 폭파해 광석을 채취한 뒤 실어 날랐는지 과정을 하나하나 선보였다.
광부들은 작업을 하면서 석유램프에 의지했는데, 램프가 꺼지면 완전한 암흑 속에서 돌을 부딪쳐 다시 불을 켜야 했다는 게 안내자의 설명이다.
추위와 축축함, 암흑 속에서 구멍을 뚫고 폭파한 뒤 광물을 채취할 때 소음까지 광부의 노동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잠시나마 수십년 전 광부의 일상을 온몸으로 체험한 참가자들은 수송 열차를 타고 지상으로 다시 나왔다.
지상으로 올라와 1천년에 달하는 광산의 역사를 망라한 바로 옆 박물관으로 향했다. 지하 2개, 지상 1개층 짜리 이 건물은 광부들이 재료와 장비, 기기 등을 보관하던 창고를 개조한 곳이다.
광산의 1천여년의 역사 중 특히 두드러진 시기는 나치의 강제노역이 이뤄진 기간이다. 12년에 불과한 이 시기에 일어난 일들을 보이는 데에 3개 층으로 이뤄진 전체 공간의 10%가 활용됐다는 게 박물관 측의 설명이다.
지하 2층에 펼쳐진 강제노역과 관련한 전시공간은 "매일 아침 나는 반쯤 굶주리고, 고향을 향한 그리움에 가득한 채로 일어났다"는 한 강제 노역자 피해자의 증언과 함께 시작된다.
1990년대 후반 독일에서 기업들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외국인 강제노역에 대해 직시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면서 람멜스베르크 광산에서의 강제노역도 재차 주목받았다.
당시 기림비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독일 정부는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등 피해자의 고국에 직접 가서 실제 강제노역을 했던 역사의 산증인 50여명 중 절반 가까이 일일이 만나 증언을 받았다.
살아있는 역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증인이 돼준 강제노역자의 이름과 이야기, 절규는 현재 차례로 전시돼 있다.
한 강제노역자는 "우리는 하루 250g의 빵과 녹회색의 수프와 당근을 배급받았다. 굶주림과 고된 노동으로 우리의 다리는 항상 부어있었다"고 증언했다.
안내원은 "철조망에 둘러싸인 집단 임시수용소에 머물던 강제노역자들은 무장한 보안요원의 감시를 받으며 굶주림을 면하기에 턱없이 모자란 식료품을 배급받았다"고 말했다.
또 허가를 받지 않으면 외출할 수 없었고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강제노역을 피해 도주하거나 작업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나치의 비밀국가경찰 게슈타포에 감금됐고 외국에서 온 강제노역자가 독일 여성과 접촉하면 사형에 처했다는 게시 글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린 이 광산 역시 독일 곳곳의 박물관, 기념관처럼 한때 국가와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된 반인류 범죄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직시하는 독일의 '용기'를 웅변하는 현장이었다.
yulsi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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