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 친러반군 겨냥한 민족 말살 주장하며 수호자 자처"
크림반도 합병 때도 주장…"푸틴, 구소련 전 지역에 주권행사 야심"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 우크라이나 전쟁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가 동부 분쟁지역에서 러시아인을 상대로 '제노사이드(학살)'를 벌이고 있다고 언급해 그 배경에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단순히 그가 주장하는 대로 분쟁지역 러시아인을 걱정하는 것을 넘어 옛 러시아 혈통이 남아 있는 구소련 영토에 대한 영향력 확대의 야심을 품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나온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15일(현지시간)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회담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제노사이드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돈바스 지역에 있는 친러시아 주민들이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탄압받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러시아 관영 매체와 고위관리들은 이후 푸틴 대통령의 비판을 대대적으로 옮기며 홍보했다.
러시아 외교관들은 우크라이나가 돈바스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한다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문건을 뿌렸다.
친러시아 반군들은 우크라이나군이 공격해올 것이라며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대피령을 내리기도 했다.
제노사이드(genocide)는 민족이나 소수집단 말살을 뜻하는 인류 최악의 흉악범죄다.
구체적 범죄구성 요건은 유엔이 1948년 채택한 '제노사이드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Genocide Convention)에 적시돼 있다.
여기에서 제노사이드는 특정 국가나 민족, 인종, 종교를 말살하기 위한 ▲ 집단의 구성원 살해 ▲ 심각한 신체, 정신적 가해 ▲ 집단해체를 위한 생활여건 파괴 ▲ 출산억제 ▲ 어린이 강제이주로 규정된다.
푸틴 대통령이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를 꺼내든 이유로는 먼저 우크라이나 침공 정당화가 거론된다.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병합할 때도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민족 박해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20일 해설기사를 통해 푸틴 대통령의 입에서 제노사이드가 직접 나온 것을 침공의 전조로 해석했다.
학살을 당하고 있는 분쟁지역 내 러시아인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는 식의 논리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제노사이드가 과거 제국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러시아의 국가전략을 압축적으로 담은 용어라는 관측도 나온다.
NYT는 "적대적인 서방에 지배당하는 세계에서 구소련 국가들에 있는 러시아 민족을 적법하게 수호한다는 러시아의 진실한 믿음을 반영하는 주장"이라고 해설했다.
그러면서 "그런 세계관에서 구소련 지역의 러시아 영향력 감소는 러시아인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다"며 "특히 푸틴 대통령이 사실상 러시아로 간주하는 우크라이나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주장했다.
결국 제노사이드 주장은 러시아가 자국 국경을 넘어 존재하는 러시아 영향권 전체에 대한 주권, 그 지역을 군사력으로 통제할 권한을 주장하려는 선동이라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2000년 집권 때부터 이미 강대국 러시아 건설과 미국 1극 체제를 탈피하는 다극 체제 구축을 대외정책의 핵심 기치로 내세우고 구소련 국가들에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했다.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경을 대규모 병력으로 포위한 뒤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포기를 법적 문서로 약속하고 나토의 동진을 중단하라고 서방을 압박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작년 4월 돈바스 지역의 분쟁을 해소할 최선책으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제시했고, 미국은 조건만 맞으면 나토 문호를 개방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제노사이드 주장은 다른 한편에서 세계 경찰을 자처해온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인권실태를 비판하는 데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중국의 신장 지역 무슬림 소수민족인 위구르인 탄압이 인종청소에 준하는 제노사이드에 해당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jangj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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