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J "냉전종식 후 서방에 굴욕감…벼랑끝 전술로 유럽 안보지도 재편"
(서울=연합뉴스) 이주영 기자 = 세계의 이목이 우크라이나 동부에 쏠리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돈바스 지역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럽의 군사적 긴장을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 이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푸틴 대통령이 돈바스 지역에 대한 군사개입을 공식화하면서 우크라이나는 전면전 직전 단계에 놓여있다.
푸틴 대통령은 서방 국가들을 상대로 한 이 위험한 도박에서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1일(현지시간) 푸틴 대통령의 야망은 러시아에 굴욕감을 준 냉전종식 후의 안보 협정을 바로잡고 동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냉전시대 수준으로 회복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돈바스 지역 분리독립 승인과 러시아군 진입 명령을 통해 냉전 후 그려진 유럽의 안보지도를 다시 그리는 게 목적이라는 것을 명백히 밝혔다.
그는 이날 대국민 연설에서 러시아가 지난 30여 년간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받은 처우에 대한 불만을 나열하며 "러시아는 우리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보복 조치를 할 권리가 있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금지와 나토군 배치를 1990년대 독일 통일 이전으로 되돌릴 것 등을 요구한 것은 자신이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규정한 소련 붕괴와 이후 상황들을 되돌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옛 소련 정보기관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 출신으로 독일에 배치돼 베를린 장벽 붕괴를 지켜본 푸틴 대통령은 소련이 무너지고 경제 파탄 속에 러시아의 영향력이 서방에 일방적으로 밀리며 줄어드는 과정에 큰 굴욕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존스홉킨스대 메리 새롯 교수는 "푸틴 대통령은 지금 소련 시대처럼 러시아 주변에 완충지대를 만들려 한다"며 "이를 통해 미국과 나란히 초강대국으로 복귀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접근 방식은 미국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으로서 세계의 주요 문제는 러시아를 포함한 강대국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고, 그는 나토에 대해서도 냉전시대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소련의 관계처럼 미국의 대리인에 불과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가안보회의(NSC) 유럽·러시아 담당 보좌관을 역임한 피오나 힐은 "러시아가 원하는 것은 위압적인 힘"이라며 "지금 벌어지는 일은 바로 이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작년 7월 공개한 장문의 에세이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는 한 민족이고 모두가 9세기 유럽 최대 국가 루스제국의 후손이라고 언급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를 정당화했다.
전·현직 서방국가 관리들은 1990년대 미국과 서방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잘 정리하지 못했고 냉전 승리에 지나치게 도취해 있었다고 지적한다.
또 일부에서는 긴장 완화를 위해 옛 소련과 체결했던 군축협정 일부는 사실상 폐지된 상태이기에 유럽 안보의 틀을 푸틴이 원하는 것처럼 냉전 이전 상태로는 아니더라도 다시 손 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소련 붕괴 직전 모스크바 주재 영국 대사를 역임한 로드릭 브레이스웨이트는 "1990년대 서방의 외교가 거만하고 효율적이지 못했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푸틴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이유는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푸틴의 견해는 그만의 독특한 생각이 아니며, 그가 말한 소련 붕괴로 인한 굴욕감, 나토의 확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역사적 관계 등에 대한 것은 수많은 러시아 국민이 똑같이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존스홉킨스대 새롯 교수는 냉전 종식 후 상황에 대한 러시아의 주장을 공식 기록과 당신 인물들의 개인적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실제로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에 나토를 동유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여러 차례 했지만 지키지 않았다고 말했다.
브레이스웨이트 전 영국 대사는 푸틴 대통령이 2008년 조지아와 2014년 크림반도 침공 때도 상황을 극한으로 몰아가다가 멈춰야 할 정확한 시점에 멈추는 전략으로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지만 지금 우크라이나 상황은 그때와는 좀 다르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푸틴 대통령이 쉽게 손 떼고 나오기 어려울 만큼 '판돈'을 높여 놓았다는 것이다.
미국이 유럽 안보에 대한 논의를 약속하면 서방으로부터 목표한 것을 얻었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되돌릴 수도 있지만, 이는 자신이 지금껏 요구한 것을 고려하면 체면이 깎일 위험이 있는 시나리오다.
서방 분석가들은 러시아가 실제로 우크라이나를 공격한다면 위험이 너무 높다면서 러시아 군대가 우세하겠지만 적대적인 대중을 장기간에 예속시키려 할 경우 수렁에 빠질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브레이스웨이트 전 대사는 푸틴 대통령이 집권 말기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 유사한 점이 있다며 "푸틴은 1989년과 1990년 정치적 감각을 잃어가던 대처 전 총리처럼 멈춰야 할 시점을 아는 감각을 잃은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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