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늘어도 신규 투자는 부진…구조적 수급 불균형 심화
"에너지·원자재 당분간 오른다…상반기까지 인플레 지속"
(서울=연합뉴스) 정열 기자 =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 주요 원자재 가격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원자재 시장이 또 한 번의 '슈퍼 사이클'(초호황)에 진입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거의 모든 물가에 영향을 주는 주요 원자재 가격의 상승세가 장기화할 경우 지난해 하반기부터 민생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고 있는 인플레이션 현상도 상당 기간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특히 우크라이나 사태가 원자재 가격의 큰 변수로 떠올랐다.
2000년대 초반부터 장기간 이어졌던 원자재 시장 슈퍼 사이클이 주로 중국 등 신흥국의 수요 급증에 따른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세계 각국이 추진 중인 탄소중립 정책이 배경으로 지목된다.
◇ 파산 위기 몰렸던 화석연료 기업의 '화려한 부활'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정책이 범(汎)지구적인 의제로 떠오르면서 전통적인 화석연료 기업은 한동안 사양산업 취급을 받았다. 일부 환경단체나 정치인들은 이들을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낙인찍기도 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기 침체로 수요가 급감하면서 상당수 화석연료 기업이 적자를 기록했고, 미래는 더욱 어두워 보였다.
하지만 이들 기업은 불과 1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에너지 업계에 따르면 세계 최대 민간 석탄업체인 피바디 에너지는 지난해 4분기에 5억1천300만 달러(약 6천100억 원)의 순이익을 올렸다고 발표했다. 약 20년 만의 최대 분기 순익이다. 이 회사는 전년 동기에는 1억2천9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한 바 있다.
짐 그레치 피바디 최고경영자(CEO)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철강생산용 연료탄과 발전용 연료탄의 가격이 모두 강세를 보이면서 수익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미국 2위 석탄업체인 아치 리소시스도 지난해 4분기 2억2천700만 달러의 순익을 거뒀다고 밝혔다.
피바디와 아치는 석탄 수요 감소와 환경규제 강화 등으로 경영난이 심화하자 2015∼2016년 차례로 법원에 파산보호신청을 낸 바 있다.
5∼6년 전만 해도 구조적인 업황 부진으로 파산 위기까지 몰렸던 석탄 메이저들이 깜짝 부활한 것이다.
세계적인 에너지 대란으로 석탄 가격이 급등한 것이 이들의 실적을 견인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제 석탄 시세의 기준이 되는 호주 뉴캐슬의 발전용 연료탄 가격은 최근 1년 사이 190% 급등했다.
폴 랭 아치 리소시스 CEO는 "솔직히 지난 20여 년 동안 이런 가격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BHP와 글렌코어 등 다국적 광산업체들도 석탄, 니켈, 알루미늄 등 주요 광물 가격의 강세에 힘입어 지난해 역대 최고 수준의 실적을 기록했고, 엑손모빌과 셰브런, BP, 셸 등 석유 메이저들도 크게 개선된 지난해 실적을 최근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주요 원자재 기업의 실적 호전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원자재 시장이 장기간 지속되는 구조적인 슈퍼 사이클에 진입했다는 신호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호주 일간 시드니모닝헤럴드는 BHP가 발표한 산업전망 보고서를 인용해 "원자재 부문이 또 한 번의 '슈퍼 사이클'에 진입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탄소중립으로 원자잿값 상승세 장기화 가능성…인플레 압력 가중
탄소중립 정책은 화석연료 사용을 줄여 탄소배출을 사실상 '0'으로 만들자는 것이지만 실제로 나타나는 현상은 정반대다.
지난해 유럽과 미국, 중국 등 주요 경제권이 급격한 탄소중립 정책을 추진하면서 석탄이나 석유 소비량은 되레 증가했다.
주요국이 화석연료를 대체하기 위해 설치한 풍력과 태양광 등이 이상 기후로 제 기능을 못하면서 에너지 대란이 빚어지자 부족한 전력을 메꾸기 위해 화석연료 소비가 늘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석탄 발전량은 9% 증가하면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에서 약 20% 급증했고, 주요 탄소 배출국인 인도와 중국에서도 각각 12%, 9%가량 늘면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IEA는 "세계적으로 석탄 화력발전이 많이 늘면서 각국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없다면 올해 세계 석탄 수요는 역대 최고치를 경신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급격한 탄소중립 정책이 수요와 가격을 밀어 올린 것은 화석연료뿐만이 아니다.
탄소중립 달성에 필수적인 풍력과 태양광, 전기차용 배터리 등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철광석, 구리, 니켈, 리튬, 코발트 등의 가격도 거의 예외 없이 고공행진 중이다.
친환경 전환정책이 원자재 가격과 물가 상승을 야기하는 이른바 '그린플레이션' 현상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 중국 등 주요 경제권을 강타하고 있는 인플레이션 현상이 상당 기간 지속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구조적인 변화 때문이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주요국의 친환경 전환 정책은 되돌릴 수 없는 대명제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꼭 필요한 원자재 가격의 상승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많은 원자재 업체들이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규 투자를 꺼리고 있는 것도 수급 불균형에 의한 가격 상승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BHP와 글렌코어, 리오틴토 등은 중국발 원자재 호황으로 낙관론이 팽배하던 2000년대 중반 대규모 추가 투자를 했다가 갑자기 광산 붐이 꺼지면서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시드니모닝헤럴드는 "석유와 석탄 부문은 세계적인 탈탄소 정책 탓에 신규 투자를 안 하고 있고, 다른 원자재 업체들도 지난번 슈퍼 사이클 때의 교훈으로 신규 투자를 최소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수급 불균형 심화에 따른 원자재 가격 상승은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원자재 수입국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무역수지는 지난해 12월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20개월 만에 적자로 돌아섰고, 지난달에는 적자 규모가 역대 최대 수준인 48억9천만 달러로 불었다.
2월 들어서도 지난 20일까지 무역수지가 16억7천900만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에 이어 2월에도 적자가 난다면 2008년 6∼9월 4개월 연속 적자 이후 14년 만에 3개월 연속 적자가 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이 당분간 오를 것이고 무역수지와 경상수지 악화도 불보듯 뻔한 상황"이라며 "수입물가 상승에 따른 인플레 현상도 적어도 상반기까지는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국제 유가가 배럴당 최대 125달러까지 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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