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대리점, 설계사 빼 오기 '쩐의 전쟁'…가입자 피해 우려

입력 2022-02-27 07:11  

보험대리점, 설계사 빼 오기 '쩐의 전쟁'…가입자 피해 우려
상한선 초과 수수료 제시…이직 설계사, 실적 채우려 갈아타기 양산
금융당국, 수수료 제도 개선 미온적…대리점 책임 강화도 지연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 A씨의 11세 자녀는 2세 때 심한 화상으로 큰 흉터가 남았다. 최근 '아이 신체가 어느 정도 성장했으니 피부 이식수술을 받게 하라'는 주치의 의견에 따라 수술을 결심했다. 큰돈이 드는 수술이지만 출생 때부터 어린이보험에 가입돼 있었기에 병원비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술 일정을 잡고 보험사에 문의했다가 '가입 이전 사고로 인한 수술이라 보장이 안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A씨는 인터넷 맘카페에 올린 글에서 "출생 전에 어린이보험에 가입했다가 더 좋은 상품이 나왔다는 보험설계사의 말을 듣고 갈아타기를 했는데 이런 손해를 볼 줄 몰랐다. 보험설계사가 우리 애 상황을 뻔히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억울한 마음만 든다"고 밝혔다.
B씨는 지인이 소개한 보험설계사 '보장 분석 서비스'를 받았다. 보험설계사는 사망뿐만 아니라 대부분 질병이 보장되니 다른 보험이 필요 없는 '가성비' 좋은 종신보험이 있다며 기존 상품을 해약하고 갈아타라는 안내를 받고 그 말을 따랐다. 하지만 B씨는 그사이 진단받은 질병 탓에 통합종신보험의 다수 특약에 가입할 수 없었고, 해지한 보험에서 가능했던 보장 혜택마저 없어지게 되자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냈다.
인터넷 맘카페의 보험 관련 게시물 중에는 A씨의 사례처럼 보험설계사의 조언을 듣고 갈아타기를 했다가 가입 전 병력을 이유로 보험금 지급이 거절됐다는 경험담을 쉽게 볼 수 있다. 금감원은 A·B씨와 같은 갈아타기로 인한 민원이 끊이지 않아 최근 여러 차례 소비자 주의보를 발령했다.

보험 갈아타기 또는 승환계약 피해가 계속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수수료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영업 실태 탓이라는 게 금융당국과 보험업계의 공통적인 인식이다.
승환계약은 보험모집인이 기존 보험 계약을 부당하게 소멸시키고 새로운 보험 계약을 청약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여러 보험사의 상품을 취급하는 중·대형 법인보험대리점(GA)은 불완전판매 등 불건전 영업행위에 대한 책임을 거의 지지 않고 수수료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어 과당·혼탁 경쟁에 따른 소비자 피해 우려가 상대적으로 더 크다는 지적을 받는다.
27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최근 대형 GA가 상한선을 초과하는 신계약 수수료와 각종 부가 혜택을 제시하며 보험사 또는 경쟁 대리점의 인력 '빼 오기'로 시장이 더욱 혼탁해지는 양상이다.
작년부터 보험 계약 후 1년간 보험설계사에 지급하는 수수료 상한선은 월 보험료의 1,200%를 넘을 수 없는 보험업감독규정인 이른바 '1,200% 룰'이 시행됐으나 대형 GA가 이를 무시하는 조건을 제시하며 베테랑 보험설계사를 무더기로 스카우트하는 사례가 잇따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당국도 혼탁 양상을 인지하고, 작년 말 500인 이상 대형 GA를 상대로 스카우트 현황 파악에 나섰다.
이처럼 과도한 수수료를 제시하는 스카우트 계약에는 실적 약정이 달려 있기 때문에 실적을 채우기 위해 기존 고객의 승환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험업계는 분석했다.
GA가 1년치 보험료를 훨씬 웃도는 수수료 조건을 내걸 수 있는 이유는 1,200% 룰과 위반 제재가 보험사 소속 보험설계사에 적용되나 보험대리점 소속 보험설계사에는 강제력이 없기 때문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보험대리점의 과도한 수수료 행태를 방치해 수수료 제한이 점차 종이호랑이가 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는 "시장 영향력을 키우려는 일부 GA가 이런 분위기를 악용해 보험설계사들을 무리하게 이직시키는데, 이는 갈아타기 양산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2020년 기준으로 보험설계사 100인 이상 중·대형 법인보험대리점의 수수료 수입은 텔레마케팅 대리점을 제외하고도 7조2천억원에 이른다. 2020년 소속 보험설계사 수는 19만명으로 보험사 소속 20만명과 비슷했다.
지난해 일부 보험사가 보험설계사 조직을 보험대리점으로 분리한 것을 고려하면, 현재는 법인보험대리점의 인력 규모가 보험사를 추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GA를 아우르지 않는 제도는 '반쪽짜리'로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인력 이탈을 겪는 보험사들의 주장이다.
금융당국은 그러나 수수료 규제 보완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1,200% 룰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으니 운영 실태를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보완할 부분을 개선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불완전판매 차단 등 법인보험대리점의 책임성 강화대책도 계속 지연되고 있다.
금융위 다른 관계자는 "지난해 GA 책임성 강화방안을 발표하려고 했으나 현안이 많아 시간이 더 걸리고 있다"고 말했다.
보험업계 다른 관계자는 "수수료에 지나치게 좌우되는 영업 행태가 소비자 부담·피해의 주요 원인"이라며 "긴 논의를 거쳐 도입된 수수료 규제가 유명무실해지지 않도록 개선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tre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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