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호주-일본 등 독자제재 32개국 예외적용…韓은 일단 수출통제 참여만 발표
정부, 美측과 FDPR 예외인정 협의 추진…전략물자 수출금지 외 추가제재 검토
수출차단 57개 기술 불명확해 기업들 혼란…전략물자관리원서 대응 지원
(워싱턴·서울=연합뉴스) 류지복 특파원 윤보람 기자 =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대(對)러시아 수출통제를 위해 꺼낸 조치인 해외직접제품규제(FDPR)의 적용 예외 대상에 동맹인 한국이 포함되지 않아 우리 수출기업들의 직접적인 피해가 예상된다.
특히 미국의 고강도 제재에 보조를 맞춰 러시아에 대한 독자제재에 나선 호주, 캐나다, 일본 등 다른 32개국은 FDPR 적용의 예외를 인정받은 터라 결과적으로 국내 기업만 차별적인 대우를 받게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조업 주요 경쟁국의 기업들이 FDPR 적용 예외로 원활히 수출하는 사이 우리 기업은 속수무책으로 미국 측의 수출 허가만 기다려야 하는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정부가 수출통제 참여 입장을 한 발짝 늦게 발표한데다 독자제재 조치도 취하지 않은 데 따른 것으로, 일단 정부는 이번 주 한미 고위급 회담 등을 통해 미국 측과 FDPR 적용 예외를 인정받기 위한 협의를 집중적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아울러 불충분한 정보로 기업들이 겪는 혼선을 줄이기 위한 실무적인 지원대책도 병행할 방침이다.
◇ FDPR로 반도체 수출 제한…車·스마트폰 수출 직접 영향권
1일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미 상무부가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발표한 수출통제에는 수출통제리스트(CCL) 7개 분야 57개 하위 기술 항목에 대해 FDPR을 적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FDPR은 미국 밖의 외국기업이 만든 제품이라도 미국이 통제 대상으로 정한 소프트웨어, 설계를 사용했을 경우 수출을 금지할 수 있도록 한 제재조항이다.
전자(반도체), 컴퓨터, 통신·정보보안, 센서·레이저, 해양, 항법·항공전자, 항공우주 등 7개 분야에 관한 세부 기술 전부가 해당한다.
상무부 통제리스트에 등재되지 않은 일반 소비재는 원칙적으로 대상에서 제외하지만, 최종 용도가 군용인 경우에는 소비재에도 FDPR이 적용된다.
당장 한국 기업은 FDPR 적용 대상인 제품을 러시아로 수출할 경우 미 상무부에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특히 반도체, 컴퓨터, 통신장비 등 ICT 분야 기업들이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게 됐다.
반도체만 놓고 보면 러시아로 직접 수출하는 물량은 전체의 0.06%로 비중이 크지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업의 현지 공장 생산 제품에 쓰이는 관련 부품들까지 고려하면 피해는 더 클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FDPR로 인해 현대차[005380], 기아[000270] 등 국내 기업들의 러시아 공장에 완성차 생산에 필요한 반도체 칩 등이 공급되지 않으면 생산 차질이 불가피하다.
스마트폰 등 소비재까지 규제 대상에 포함되면 러시아 내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30%(작년 기준)를 차지하고 있는 삼성전자[005930]를 비롯한 전자업체의 수출도 제한될 수 있다.
스마트폰은 원칙적으로 소비재에 해당해 FDPR 적용 대상이 아니지만, 반도체가 탑재돼 있는 데다 러시아에서 스마트폰을 수입한 뒤 군용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FDPR 적용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FDPR 규정이 불명확한 점도 기업들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 상무부는 FDPR 적용 대상인 57개 기술을 구체적인 명단이 아니라 설명으로만 적시해뒀다. 예컨대 '범용 전자장비에 탑재되는 모듈·장비' 등으로만 적혀있는 식이다.
또한 한국 기업이 러시아에 있는 자국 공장에 부품을 보낼 때 수출통제 대상이 되는지도 예외규정 등으로만 나와 있어 불명확하다.
결국 국내 기업은 일일이 미 상무부 판단을 구해야 한다. 승인을 얻을 때까지는 관련 제품·부품의 러시아 수출이 사실상 일시 중단되는 셈이다.
정부는 산업부 산하 전략물자관리원 '러시아 데스크'를 통해 기업들의 FDPR 적용 여부를 자문해주기로 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기업들의 특정 수출 품목의 제재 여부를 자체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만큼 전문적인 역량을 동원해 이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향후 제재 품목이 구체화되고 여기에 우리나라의 대러 주력 수출 상품이 얼마나 포함되는지에 따라 제재 영향권에 드는 기업 수 등 피해 범위가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정민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부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상무부 통제리스트 카테고리 3∼8에 등재된 상품만이 아니라 대러 주력상품인 자동차, 기계, 플라스틱, 전기제품 등 수출행정규제(EAR99) 상의 최종 소비재에도 FDPR이 적용될 경우 대러 수출이 급감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 주요 경쟁국들은 예외 적용…정부, 이번주 미 측과 집중 협상
더 큰 문제는 한국 제조업의 경쟁국이기도 한 미국의 주요 우방국이 빠짐없이 FDPR 예외 적용을 받는다는 점이다.
미 상무부는 독자 제재에 나서겠다고 한 유럽연합(EU) 27개국과 호주, 캐나다, 일본, 뉴질랜드, 영국 등 32개국을 이 규정의 적용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이들 국가의 경우 미국과 비슷한 내용의 독자 제재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해당국 정부에서만 허가를 받으면 수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의 FDPR 규제에 동참하되 독자제재에는 나서지 않아 중국, 인도, 대만 등과 함께 FDPR 적용 예외 대상에서 제외됐다.
미국의 FDPR는 거의 모든 수출 허가에 대한 금지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 적용 예외를 받는 국가의 기업이 해당국에 허가를 신청해도 허가가 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적용 예외를 받는 국가의 기업이든, 한국의 기업이든 허가를 받지 못할 공산이 크다는 점에서는 같은 입장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업 입장에선 수출 허가를 받으려고 할 때 한국 정부가 아닌 미국에 신청해야 하는 점 자체가 경영상 큰 불확실성이자 부담이 된다.
최악의 경우에는 FDPR 예외 국가의 기업이 각 정부의 판단에 따라 러시아에 문제없이 수출하는 사이 우리 기업은 미 상무부 승인을 받지 못해 수출길이 막히는 사태도 발생할 수도 있다.
외교적으로도 미국의 맹방인 한국이 예외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점만 놓고 보면 동맹 관계에 긍정적인 신호라고 보긴 어렵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정부는 FDPR 적용 예외를 인정받기 위해 이번 주 미 상무부와 집중 협상에 나선다.
정부 실무진은 상무부 산업안보국(BIS)과 국장급 협의를 시작하며,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오는 3일 미국을 방문해 상무부 등 정부 고위층과 접촉할 예정이다.
FDPR 적용 예외를 위해서는 이들 품목에 대해 한국이 스스로 미국과 같은 수준의 수출통제를 하는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로는 수출기업들을 계도하는 방식으로 사실상의 수출 제한을 거는 방식, 고시 등의 형태로 한국의 독자적 수출통제 품목 리스트를 만드는 방식 등이 거론된다.
정부는 일단 미 재무부에 러시아에 대한 전략물자 수출금지 외에 추가적인 수출 제재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힌 상태다.
결국 미국을 만족시킬 만한 대러 수출통제 조처를 해야 하는데 이 경우 정부가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던 대러 독자제재를 도입하는 셈으로, 한러관계에 부정적 영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정부 관계자는 "국제 사회의 대러 수출통제 조치와 '유사한 수준'으로 러시아에 대한 수출통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내용이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것"이라며 "이번 주 중으로 협상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상당수 국가가 이미 미국의 FDPR 예외 대상이 된 뒤에 한국이 대러 제재를 발표한 것을 두고 '뒷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적으로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러시아에 진출한 기업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에 미칠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의도와 함께 대북 문제에서 러시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지정학적 상황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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