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 "현실부정이 확신 변해가며 공포 증폭"…키예프 중앙역 인산인해
"싸우고 싶다…하지만 지금이 키예프 떠날 마지막 기회"
(서울=연합뉴스) 윤종석 기자 = "비키세요, 비키세요! 아이들, 여성, 노약자부터 타세요!"
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철도 중앙역 플랫폼에선 공포에 질린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군인들도 역사 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함을 질러댔다.
플랫폼에는 수천명이 몰려들어 2시 7분 출발하는 서부 도시 이바노프란키우스크행 기차에 몸을 실으려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차표를 가지고도 탈 수 없었다.
질서 유지를 맡은 군인들이 표에 상관없이 어린이를 동반한 여성부터 그외 여성, 노약자 순서로 탑승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침공 엿새째를 맞은 이날 아비규환의 탈출 러시가 이뤄지고 있는 키예프 중앙역의 풍경을 영국 일간 가디언 션 워커 기자가 전했다.
"여기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2차 세계대전의 한 장면을 담은 사진을 보는 것 같지 않으세요? 이제 1주일도 안 됐어요. 한 달 뒤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가세요?"
15살짜리 딸과 함께 기차역에 나온 미술사학자 타냐 노브고로그스카야(48)는 역의 풍경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6개의 기차표를 구해 역에 나왔지만 번번이 서부행 기차에 탑승하는 데 실패했다.
기차는 오자마자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꽉 찼고, 일부 가족들은 아이들과 엄마만 먼저 태울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키예프 시민들은 지금 공포에 질려 있다.
러시아의 침공 첫날에는 설마 했는데 진짜 전쟁이 벌어진 데 대한 충격과 현실 부정이 교차했다. 그 후 러시아군을 격퇴한 우크라이나군의 대응과 단합된 모습에 자부심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내 자긍심은 공포로 뒤바뀌었다.
예상외 고전을 맛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플랜 B'를 가동하려 하기 때문이다.
키예프가 과거 러시아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폐허가 됐던 시리아 알레포나 체첸공화국의 그로즈니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군의 동향은 심상찮다. 제2의 도시 하리코프에 집중 폭격을 가했고 키예프 방면으로 긴 군사 행렬이 이동하고 있다.
러시아군이 키예프를 포위한 채 화력을 집중해 맹공격을 가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온다.
이날에는 러시아군이 키예프의 TV 방송국 타워를 폭격해 무너트려 5명이 숨졌다.
방송 타워는 '바비 야르' 협곡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시설 옆에 있다.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이 협곡에서 유대인 3만명을 포함해 15만명 이상을 학살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키예프 시민들에게 공습을 할 수 있으니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라고 경고했다.
노브고로그스카야는 다른 키예프 시민들처럼 러시아군의 포악성을 과소평가했고 대피하라는 말을 무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날 폭격을 받아 폐허가 된 하리코프 민간인 지역의 모습을 보고 나선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제는 키예프를 떠날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웬만하면 남아서 같이 싸우고 싶지만 아이가 있으니 떠날 수밖에요."
이 모녀는 오늘 중에는 기차를 타고 키예프를 벗어나길 희망한다.
하지만 기차역에는 이들 모녀처럼 필사적으로 탈출하려고 몰려든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워커 기자는 전했다.
이윽고 기차가 육중한 바퀴 음과 함께 출발했다. 객차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얼굴이 차창 너머로 비쳤다.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있는 조그만 아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플랫폼에 남은 사람들은 절망했다. 한 젊은 커플은 부둥켜안고 울었고, 한 여성은 고양이를 안고 기둥에 기대선 채 훌쩍였다.
아내와 함께 개를 데리고 기차를 타러 나온 '유리'라는 남성은 탑승 우선 자격이 한참 떨어져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고 털어놨다.
러시아 침공 첫날 아파트 지하실에서 밤을 보낸 부부는 추위와 불편함을 견디다 못해 이후엔 자신의 9층 아파트 화장실에서 지내왔다고 했다.
그들도 결국 하리코프의 참혹상을 보고 나서 탈출을 결심했다고 전했다.
"러시아가 하리코프를 공격할 거라곤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들의 계획은 확실히 알게 됐죠. 옛날 체첸에서 했던 일을 여기에서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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