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세계의 경찰' 역할 포기 조짐에 국제정세 불안 우려
우크라 침공에도 파병은 안해…'대만사태' 땐 의문 제기
(서울=연합뉴스) 정열 기자 = "백악관은 어디에 있나?"
지난해 10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단독 인터뷰로 화제를 모았던 해들리 갬블 CNBC 기자가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수도 키이우(키예프)가 함락 위기에 처했는데도 이를 막기 위한 실질적 군사 개입에 선을 긋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소극적 대응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오랫동안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해온 미국이 점점 국제 분쟁에 개입하기를 꺼리면서 세계정세가 더욱 불안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온다.
러시아와 중국 등이 힘을 바탕으로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우크라이나와 대만 등 약소국들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방어할 수밖에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가 도래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 거친 '말폭탄'에 역대급 경제제재까지…그래도 파병은 안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직전까지 미국의 고위 관리들은 러시아를 향해 가시 돋친 '말폭탄'을 쏟아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19일(이하 현지시간)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러시아는 행동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며, 미국과 유럽이 가할 가혹한 제재로 곧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이든은 1일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한 취임 후 첫 국정연설에서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에게 자유세계가 책임을 묻고 있다며 "동맹과 함께 우리는 강력한 경제 제재를 집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앞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지난달 11일 호주에서 쿼드(Quad·미국·일본·호주·인도의 안보 협의체) 4개국 외무장관 회담을 마친 뒤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러시아가 새롭게 공격적인 길을 간다면, 엄청난 결과에 직면하게 될 거라고 분명히 밝힌다"고 경고했다.
또 존 파이너 백악관 국가안보부보좌관은 CNN에 출연, 러시아의 침공이 현실화할 경우 우크라이나로의 파병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그것은 동맹의 결정이 될 것"이라며 "나토 동맹이 병력 배치와 관련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답했다. 마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먼저 침공하면 미군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군이 우크라이나에 투입되는 것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는 뉘앙스였다.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위협이 고조되던 시점에 최정예부대인 82공수사단 병력 3천 명을 폴란드에 추가 배치하고 독일에 주둔 중이던 미군 1천 명을 루마니아로 전환 배치하는 등 군사 대응을 할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자 미국과 서방이 꺼내든 카드는 경제 제재였다.
러시아 은행들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배제하고 푸틴과 측근들의 해외 자산을 동결하기로 하는 등의 제재조치를 잇달아 발표했다.
이같은 경제 제재는 중장기적으로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만 당장 러시아군의 파상공격으로 함락 위기에 처한 키이우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미국 안팎에서 소극적 대응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지난달 24일 러시아 침공 후에도 미국과 나토가 병력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린 홀로 남겨져 나라를 지키고 있다. 누가 우리와 함께 러시아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었는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때부터 해외에서 발생하는 군사 분쟁에 가급적 개입을 자제하는 기조를 이어오고 있다"며 "미국 내 여론도 참전에 부정적"이라고 말했다.
AP통신이 지난달 18∼21일 시카고대 여론연구센터(NORC)와 함께 미국 성인 1천289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응답은 26%에 불과했다.
절반이 넘는 52%는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답했고, 20%는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의 전쟁 수행 지지율이 72%에 달했던 것과 대조된다.
오는 11월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중간선거를 앞둔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이같은 여론을 무시할 수가 없는 입장이다. 바이든은 특히 미국 내 인플레이션이 40년 만에 최고 수준까지 치솟으면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다.
AP는 향후 몇 달간 우크라이나 위기가 워싱턴 정가를 휩쓸 수 있지만,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유권자들은 국내 경제상황에 더 큰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고 전했다.
◇ 우크라 다음은 대만?…"미국이 대만 위해 피 흘릴지도 의문"
러시아가 거리낌 없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수 있었던 것도 세계 최강의 전력을 가진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호주 공영 ABC 방송은 "미국은 강한 어조로 경고를 하고, 동맹을 결집하고, 제재로 응수하지만 싸우려고 하지는 않는다"며 "그것은 푸틴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나 마찬가지이며 시진핑도 미국이 대만을 위해 피를 흘리려 할지 궁금해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의 침공시 '가혹한 제재' 방침을 강조하면서도 미군을 우크라이나에 직접 파병하는 방안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반복해서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세계의 경찰' 역할을 포기한 듯한 미국의 소극적 대외정책 기조는 자주국방이 사실상 불가능한 약소국들에는 큰 불안 요인이 될 수 있다.
여러모로 우크라이나와 닮은꼴인 대만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불안해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가 인접 강대국인 러시아의 위협에 시달려온 것처럼 대만도 중국의 노골적인 침공 위협을 받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역사적으로 자국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도 대만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자국 영토의 일부로 여긴다.
나토 회원국이 아니어서 외부 침략시 미군의 자동개입 의무가 없는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대만 역시 중국이 침공해도 미군이 자동개입할 의무는 없다.
다만 미국이 1979년 대만과 단교한 뒤 국내법인 '대만관계법'을 제정해 대만에 자위용 무기를 판매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을 뿐이다.
비록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경우 미국이 대만을 방어할 것이란 입장을 수차례 밝히긴 했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면 실제로 파병을 할지는 미지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안보 불안감이 고조되자 대만 정치인들은 불안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양새다.
대만의 중국 담당 부처인 대륙위원회 추타이싼(邱太三) 주임위원(장관급·이하 주위)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인 지난달 25일 한 인터뷰에서 "'오늘은 우크라이나, 내일은 대만'이라는 우려가 있으나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추 주위는 지정학적 전략상의 지위, 지리적 정세, 경제적 중요성, 미국과의 관계 등 4가지 조건에서 대만은 우크라이나와 다르다며 "대만이 무너지면 대만해협은 물론 남중국해 정세가 요동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우크라이나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도록 미국 등 서방이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됐다.
그는 또 "우크라이나는 전차가 직접 국경을 넘어 지상전을 치를 수 있지만, 바다로 둘러싸인 대만은 그렇게 타격할 수 없다"고 강조한 뒤 "대만은 반도체 공급의 국제적 거점으로서 농산물과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우크라이나와 경제적 위상이 다르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발언은 고조되는 안보 불안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다소 자의적이며 희망 사항에 가까운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미국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의 데릭 그로스먼 선임 국방분석가는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창인 상황에서 미국의 (군사개입) 자제는 대만이 침공받았을 때도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며 "만약 러시아가 별문제 없이 우크라이나를 장악한다면 그것은 대만을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정복할 수 있다는 신호를 중국에 보내는 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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