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들 "생활필수품 외 판매 중단" 선언, '공염불' 그쳐
사업 유지·평판 손상 놓고 저울질…"궁극적으로 제재 논리 훼손"
(서울=연합뉴스) 김연숙 기자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글로벌 소비재 기업들이 일부 '생활 필수품'을 제외하고는 러시아에서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생필품으로 보기 어려운 품목들이 여전히 팔리고 있다고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레이'의 감자칩, '질레트'의 면도기, '에어윅'의 실내용 방향제 등이 여전히 러시아에서 판매되고 있다. 레이와 질레트, 에어윅은 각 분야 세계 선두권을 달리는 기업들이다.
이외에 유니레버의 '리틀 페어리' 브랜드의 어린이용 화장품, '인말코'의 아이스크림 등도 판매 중이다.
이들 모회사인 펩시코, P&G, 레킷벤키저, 유니레버 등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러시아에서 제품 판매를 중단하겠다며 일부 필수 불가결한 제품은 예외로 남겨뒀다. 무엇을 필수 불가결한 제품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엇갈리는 모습이다.
정치인들과 일부 투자자, 활동가, 소비자들은 이들 기업에 러시아에서의 제품 판매와 생산을 줄여야 한다고 압박을 가해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주 직접 유니레버와 네슬레를 지목하면서 "러시아의 군사 개입을 여전히 후원하고 러시아 시장을 떠나지 않은 대기업들"이라고 비판했다.
데니스 슈미갈 우크라이나 총리는 지난 17일 트위터에서 네슬레 최고경영자(CEO) 마크 슈나이더와 대화를 나눈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슈나이더 CEO는 러시아에서 제품 판매를 지속하는 것의 부작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미국 뉴욕주 연기금도 최근 펩시코, 몬데레즈, 킴버리클라크 등과 같은 소비재 기업에 러시아에서의 사업 지속의 위험요소에 대해 고려할 것을 요청했다고 WSJ은 전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은 소속 근로자와 공급업자의 생계를 지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장 가동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합작회사나 프랜차이즈 협정에 발이 묶여 어쩔 수 없다는 곳도 있다.
러시아 검찰도 자국 시장에서 철수하는 기업들의 자산을 압류하고 직원을 체포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러시아에서 대규모 유제품 사업을 하는 펩시코의 경우 이달 초 펩시와 세븐업 판매를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우유, 치즈, 요구르트, 이유식, 유아용 식품과 감자칩은 계속 만들겠다고 선을 그었다.
이 회사는 지난주 스코틀랜드에서 러시아 수출용 씨감자 2천200t에 대한 구매 계약을 합의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펩시코 CEO는 직원들에게 보낸 메모에서 "우리는 사업의 인도주의적 측면에 충실해야 한다"며 "이는 우유와 같은 일상적인 필수품 등을 러시아에 계속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의약품, 백신, 의료용 기구 제조업체들도 '윤리적 책임'을 근거로 러시아에서 사업을 고수하고 있다.
다국적 복합기업인 코크 인더스트리는 "러시아 사업은 코크의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우리는 그곳의 직원을 떠나거나 제조시설을 러시아 정부에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며 "그렇게 하면 직원들이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되고 득보다 실이 더 커진다"고 주장했다.
WSJ은 소식통을 인용, 이들 소비재 기업이 추가 재료비와 물류비, 루블화 가치 하락 등을 충당하기 위해 주요 제품의 가격을 일제히 인상했다고 전했다. 세탁 세제 가격은 최대 25%, 여성 위생 용품은 30% 이상, 아기 기저귀는 50%가량 올랐다고 한다.
미 미시간대 파올로 파스콰리엘로 재무학 교수는 막연한 제재에 직면한 기업들이 러시아 파트너들과의 사업 관계 유지의 이익과 사업 지속에 따른 평판 손상 사이에서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의학적으로 직접 도움이 되지 않는 제품에 '필수재'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결국 그들이 겪을 평판 손상을 줄여보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이어 "제재는 전쟁의 한 형태"라며 "치즈버거, 신발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기업은 궁극적으로 제재의 논리를 훼손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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