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적 언어로 국가별 맞춤형 연설…코미디언 경력도 도움
(서울=연합뉴스) 윤종석 기자 = "적당한 쇼맨십을 갖추고 정곡을 찌르는 직설적인 언변을 구사한다. 코미디언 출신답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설득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국제사회의 지원을 이끄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대해 이와 같은 평가가 나온다고 영국 BBC 방송이 24일 보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최근 2주 동안 10개 국가의 의회에 잇따라 영상연설을 하면서 적잖은 국제사회의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BBC는 젤렌스키가 어떻게 연설마다 기립박수를 끌어내며 청중을 사로잡았는지 분석했다.
우선 그는 러시아라는 군사 대국에 맞서 당당히 싸우는 약소국 대통령이라는 이미지 메이킹을 능숙하게 해내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시 상황임을 보여주듯 며칠간 깎지 않은 푸석한 턱수염에 군용 녹색 티셔츠 차림으로 화상연설에 임한다. 그는 종종 연설을 마칠 때에는 주먹을 꽉 쥐고 힘차게 거수경례한다.
청중의 큰 박수소리가 채 끝나기 전에 그는 화면 너머로 사라진다. 그는 국가 존립이 걸린 전쟁을 이끌며 해야 할 일이 많은 매우 바쁜 사람이다.
영국 왕립연합서비스연구소의 조너선 이얼 연구원은 "그는 자국의 정신을 표현할 줄 안다"라며 "연설 내용만 아니라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등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연설 내용도 어느 국가를 상대하느냐에 따라 차별화된 내용으로 채워져 청중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BBC는 분석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부터 미국의 9·11 테러까지 젤렌스키는 상대하는 국가의 큰 역사적 사건이나 트라우마를 적절히 이용했다.
프랑스 의회에 연설할 때는 '자유·평등·박애'라는 국가 모토를 외쳤고 일본에는 핵폭탄의 아픈 기억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도 그의 말은 두루뭉술하지 않고 오히려 본능적이고 직설적이라고 BBC는 평가했다.
영국 의회에서 한 연설에선 바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영국이 겪은 2차대전과 비교했다.
그는 윈스턴 처칠 전 수상의 이름을 직접 꺼내지 않으면서도 그가 됭케르크 철수 후 했던 연설의 유명한 대목인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숲속에서, 들판에서, 해변에서, 그리고 도시에서 싸울 것이다'를 언급하며 나치 독일과 맞서 싸운 처칠을 청중 앞에 소환하기도 했다.
BBC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연설하면서 각국에 전쟁을 외면하는 데서 오는 수치심을 적절히 끌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오타와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로 정치 수사학을 연구하는 노미 클레어 라자르는 "연설마다 그는 '당신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냐'를 묻는다"라며 "이 순간에 부끄럽지 않게 살지 못하면 창피한 줄 알라고 말한다"라고 분석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 연설에선 진주만 공습과 마틴 루서 킹 목사 등을 언급하고는 "나는 테러 행위에 대한 응답을 듣고 싶다. 이것이 지나친 일인가"라고 물었다.
이탈리아에선 그는 푸틴의 측근들이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즐기는 것을 거론하며 현지 정치인들을 자극했다고 BBC는 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직전만 해도 지지율이 저조했고 그가 코미디언 출신이라는 점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달갑지 않은 꼬리표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코미디언 경력이 적잖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BBC는 조명했다.
라자르 교수는 "코미디언은 청중과 친밀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먹고 산다"라며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웃기고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지 느끼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연설은 확실히 서방 외교가에서 효과를 내고 있다.
그는 연설을 통해 러시아의 폭격을 막기 위해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해 왔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신 얻어가는 것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여러 국가가 최근 비행금지구역 대신 대공 미사일 시스템 등을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는 것이다.
조너선 이얼 연구원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끈질긴 호소는 결국 통했다"라며 "서방 지도자들은 전쟁을 논의하는 집중적인 회의를 열 예정이다. 이 회의들의 주제는 우크라이나에 어떤 무기를 쥐어줘야 하는지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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