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강진욱 기자 = 2차 세계대전 당시 어린 나이에 부모의 손을 잡고 독일 나치를 피해 고향을 떠나야했던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이 러시아의 공격을 피해 또다시 80대 고령의 몸을 이끌고 피난길에 오르고 있다.
AP통신은 28일(현지시간) 나치 희생자를 대변하는 대독(對獨)유대인청구권회의(Conference on Jewish Material Claims Against Germany, 이하 청구권회의)와 유대인공동분배위원회(JDC) 등 미국 유대인 단체들이 우크라이나에 사는 고령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독일로 피난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올해 83세의 타티아나 주라블리오바 씨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에 살다가 피란길에 올라 26시간만에야 지난 25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외곽의 양로원에 도착했다.
주라블리오바 씨는 AP와 인터뷰에서 지난달 말 러시아의 공격이 시작되자 "온몸이 벌벌 떨렸다"며 "(2차 대전 때의) 그 공포가 아직 내 안에 숨어있을 줄 몰랐다"고 말했다.
어릴 적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살던 그녀는 나치 군대와 그 추종자들이 유대인을 학살하기 시작할 무렵 어머니 손을 잡고 카자흐스탄으로 도망쳤다.
그는 "지금은 너무 늙어 벙커로 달려갈 수도 없다. 그래서 그냥 아파트에 머물러 있으면서 포탄이 나를 비껴가기만을 기도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공격이 점차 거세지고 아파트도 공격을 받기 시작하자 그녀는 죽지 않으려면 다시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유대인 단체의 피란 제의를 수락했다.
주라블리오바 씨처럼 우크라이나에서 살아 온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약 1만 명이며 이 중 일부가 독일로 피신했다.
미국의 유대인 단체들은 이들을 4개 그룹으로 나눠 피난을 도왔고, 주라블리오바 씨는 다른 유대인 3명과 함께 피란에 성공했다.
다수가 환자로 침대에 의지해 생활해야 하는 이들 14명이 속한 그룹은 지난 27일 우크라이나를 빠져나왔다.
늙고 병들어 긴급 구호가 필요한 우크라이나 유대인은 약 500명가량으로 이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JDC 측은 밝혔다.
몸이 쇠한 고령의 유대인들을 국경 밖으로 빼내는 일은 매우 어렵고 때로는 포격과 폭격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의료 인력과 함께 이들을 앰뷸런스에 태워 여러 전장을 지나 국경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집 밖을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병약한 이들에게 불확실한 미래를 설득하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러나 무작정 집 안에 있다고 안전한 것만도 아니다.
2차 대전 당시 여러 나치 수용소를 전전하면서도 살아남은 96세의 보리스 로만첸코 씨는 얼마 전 자신이 살던 하르키우가 공격을 받을 때 사망했다.
몇 명의 유대인들이 사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들이 사는 집이 포격을 당했다고 JDC 측은 밝혔다.
'청구권회의' 독일 지부에서 일하는 뤼디거 말로 씨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또다시 피난길에 나서야 한다"며 "이들은 지금까지 안전하게 누리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불확실성과 공포 속에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말로 씨는 약 2주 전부터 정부 관리와 외교관, 비정부기구, 국경 지역 주민 등과 접촉하며 우크라이나에 사는 유대인 생존자들을 국경 밖으로 대피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이들을 안전하고 안락한 곳으로 대피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모두가 미친 듯이 일하고 있지만, 이들을 무사히 안전한 곳을 데려가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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