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블화 가치 폭락에 경제 보호할 궁여지책…국내 여론도 의식
"찻잔 속 태풍…가스프롬방크 제재에서 보호하려는 의도"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방의 경제 제재에 대응해 자국의 천연가스를 루블화로 결제하라는 대통령령에 서명하면서 경제 전쟁에서도 양보없는 대치를 이어갔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서명한 대통령령에 따르면 루블화로 결제하지 않는 '비우호국'은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수입할 수 없다.
이 같은 강경한 조치의 배경으로는 우선 표면적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루블화 가치 급락이 지목된다.
루블화 환율은 작년에 유로당 85루블 정도였으나 러시아 침공과 함께 유로당 110루블까지 치솟았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개입해 루블을 사들여 유로당 94루블 정도로 가치를 떠받치고 있지만 이는 지속가능한 해결책이 아니다. 러시아 중앙은행의 보유외환에 한계가 있고 외화의 상당 부분이 서방 제재로 동결됐기 때문이다.
루블화 가치 하락은 서방 제재에 따른 교역 차질과 함께 물가 상승을 유발해 장기적으로 러시아 경제를 해칠 것으로 예상된다.
통화가치가 떨어지면 수입품 가격이 오르고 외국인 투자가 줄며 외화로 표시된 부채를 상환하는 부담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가스값 결제에 루블화 사용을 압박하는 것은 일단 경제를 보호하고 재원을 마련하려는 궁여지책으로 해석된다.
루블화 가치를 지킬 다른 뚜렷한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외환시장의 루블화 수요를 키우고 서방 제재를 뚫고 외화를 거둬들이려는 시도인 것이다.
제프리 쇼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선임 연구원은 미국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현금 결제대금의 동결을 막으려는 게 푸틴의 동기로 보인다"며 "러시아 은행에 직접 현금(외화)이 전달되도록 의무화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통화의 가치는 발행국 신용도와 직결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 달러화와 같은 기축통화는 그대로 패권국 위상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다.
국내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국수주의, 제국주의 성향을 지닌 푸틴 대통령에게 루블화가 헐값이 되는 사태는 더 치욕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이는 곧 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게 된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높은 루블화 가치는 자존심 문제"라며 미국의 달러 패권에 도전한다는 상징성이 있다는 점을 이번 조치에서 주목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이번 조치는 루블화 떠받치기를 넘어 서방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늘리려는 전략이라는 관측도 많다.
일단 루블화 결제 압박을 받는 비우호국에는 러시아에 자원 의존도가 높은 유럽연합(EU) 국가들이 포함돼있다.
국제통계사이트 스타티스타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러시아에 대한 가스 의존도는 독일 49%, 이탈리아 46%, 폴란드 40%, 오스트리아 64% 등이다.
유럽에서 가스는 기업의 생산뿐만 아니라 겨울철 가정 난방에 쓰인다. 기후변화 대응정책 때문에 석탄, 석유를 대체해 친환경 에너지로 가는 과도기적 연료로 중요성이 커졌다.
이런 맥락에서 루블화로 결제하거나 가스 계약을 중단하라는 러시아의 통보는 유럽 주요국의 경제와 민생을 볼모로 잡는 실력 행사로 읽힌다.
에스워 프라사드 미국 코넬대 교수는 NYT 인터뷰에서 루블화 결제 압박은 통화가치 지지뿐만 아니라 유럽국 등이 러시아에 외화를 주고 루블을 사들임으로써 제재를 스스로 위반하도록 강압하는 조치라고 지적했다.
프라사드 교수는 "푸틴이 자신이 조건을 정할 수 있다는 점을 내보이고 러시아 천연가스 수출에 의존하는 국가를 자기 뜻을 따르도록 강요하려는 것으로 관측된다"고 설명했다.
러시아가 '자원 무기화'로 대치 중인 유럽을 길들이기 위한 탐색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블화 결제가 실효성이 있는 지엔 의구심이 크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의 전화통화에서 가스를 유로, 달러로 계속 결제할 수 있다고 해 명령과 상반된 말을 꺼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번 조치를 즉각 집행하지 않고 점진적 절차를 밟아 진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각국의 대응과 정세를 봐가면서 적절하다고 보는 대상과 시점을 선별하겠다는 심산으로 관측된다.
영국 옥스퍼드대 에너지학연구소 잭 샤플스 연구원은 로이터통신에 "(루블화 결제가) 거창하게 들리지만 찻잔 속 태풍이 됐다"라며 "가스프롬방크를 가스 대금의 주요 수령자로 만들어 이 은행을 제재에서 보호하려고 방패를 세운 것"이라고 해설했다.
게다가 가스 수출 중단은 수입국뿐 아니라 러시아에도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양날의 칼'과 같다.
수입하는 국가에선 당장 '에너지 대란'을 맞이하겠지만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전비를 써야 하는 러시아로서는 재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가스 수입을 끊기는 어렵다.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은 러시아 정부 재정의 36%를 차지한다.
jangj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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