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보다 싼 日 빅맥…엔저 가팔라지며 무역적자도 심화
'엔화=안전자산' 등식 흔들…수출경쟁력 상승효과도 약화
(서울=연합뉴스) 정열 기자 = 미국 달러, 스위스 프랑 등과 함께 안전자산의 대명사로 꼽히던 엔화 가치가 6년여 만에 최저치로 떨어지면서 일본 경제가 휘청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원유와 곡물 등 각종 원자재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상황에서 심화한 엔저 현상은 일본의 무역수지 악화와 물가 상승세를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과거에는 엔저 현상이 나타나면 일본 기업의 수출경쟁력이 높아져 무역흑자가 증가했지만 도요타 등 주요 기업의 공장 해외이전으로 이런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일본 내에서는 엔저 현상이 고착화하면서 빅맥 지수 등 달러화로 환산한 각종 생활물가가 개발도상국보다도 싸지는 등 일본이 '싸구려 나라'가 됐다는 자조적인 평가마저 나온다.
◇ '엔화=안전자산' 신화 깨졌다…국제적 위기에 엔저 현상 심화
지난달 30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21.83엔에 거래를 마쳤다.
엔화 가치가 6년 7개월 만에 최저 수준까지 떨어진 이틀 전보다는 다소 진정됐지만, 연초 엔·달러 환율이 110엔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약세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원·엔 환율도 100엔당 980원대까지 떨어지면서 2018년 이후 3년 3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외환시장에서는 이런 엔화 약세를 이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동안 엔화는 미 달러화나 금 등과 함께 위기 상황일수록 가치가 올라가는 안전자산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2008년 세계금융위기 당시 엔화 가치는 4개월 만에 달러당 110엔대에서 80엔대로 뛰었다. 안전자산 선호 심리가 커지면서 엔화 가치가 올라간 것이다.
'엔화=안전자산'이란 등식이 무너진 것은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총재가 이끄는 일본은행 탓이 크다.
2013년 3월 취임 직후부터 초저금리 등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펼치며 엔저를 유도한 구로다 총재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다.
아베 전 총리가 '잃어버린 20년'에서 일본 경제를 구하기 위해 펼친 아베노믹스의 세 개의 화살 중 하나가 엔저 정책이었다.
아베노믹스는 '금융 완화→엔화 약세→수출 증가→기업이익 증가→주가 상승→투자 증가→임금 상승→소비 증가'란 선순환 구조를 기대했다.
이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지만 초저금리가 장기화하면서 부작용이 발생했다.
올해 들어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잇따라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가 확대됐고 이는 일본 시장에서의 자금 유출로 이어졌다.
현재 미국의 10년물 국채 금리는 2%대인 데 반해 일본의 10년물 국채 금리는 0%대다.
가도타 신이치로 바클레이즈 외환 전략가는 로이터통신에 "시장은 미국과 일본의 통화 정책 차별화를 엔·달러 환율을 움직인 주요인으로 본다"며 연준의 매파적(통화 긴축 선호) 발언과 대조적으로 일본은행은 여전히 비둘기파(통화 완화 선호)라는 인상을 줬으며 이에 따라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떨어졌다고 분석했다.
◇ 엔저로 日 수출경쟁력 상승?…"공장 해외이전으로 효과 약화"
과거에는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 일본 기업의 수출경쟁력이 높아져 무역흑자가 늘어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1985년 미국 레이건 행정부가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화 대비 엔화 가치를 대폭 절상한 것도 엔저를 등에 업은 일본 기업의 과도한 무역흑자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미국 등 주요국과의 통상마찰로 홍역을 치렀던 일본 기업들은 각종 무역장벽과 환율 변수 등을 피하기 위해 1990년대부터 생산시설 해외이전을 적극 추진했다.
일본 최대 자동차 업체인 도요타의 경우 2020년 12월 말 현재 전 세계 28개국에 50여개의 생산시설을 운영 중이다.
현지 생산을 하게 되면 해당국 정부로부터 각종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고 환율 변동에 따른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반면 엔저로 인한 수출경쟁력 상승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일본 언론들은 엔저가 진행되면 일본 기업의 수출이 증가해 실적이 좋아지고 이런 기대감 때문에 주가가 오른다는 통설이 깨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나쁜 엔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가라카마 다이스케 미즈호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일본 기업의 생산공장이 대거 해외로 이전하면서 엔저에 따른 혜택은 모호해진 반면 불리한 점은 뚜렷해졌다"며 "(엔저로 인한) 구매력 저하는 일본 경제를 냉각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은 1분기(1∼3월)에 마이너스 성장하는 유일한 선진 경제국이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기노시타 도모오 인베스코운용 전략가는 "엔저가 장기 추세로 자리 잡으면서 해외로 간 기업들이 번 돈을 일본으로 송금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닛케이아시아는 점점 더 많은 자동차와 다른 상품들이 판매되는 시장에서 생산되면서 엔저로 인한 수출경쟁력 상승효과는 약화한 반면 원유 등 원자재의 수입 물가는 높아지면서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전했다.
무역수지 적자 등 일본 경제 체력 약화도 엔화 가치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일본의 2월 무역수지는 6천682억엔(약 6조6천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국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한 지난해 8월부터 7개월 연속 적자 행진이다.
그동안 일본은 무역수지에서 적자를 냈어도 자본수지가 흑자를 기록하며 경상수지는 흑자를 나타냈는데,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에는 경상수지마저 적자로 돌아섰다.
◇ 日 빅맥 지수, 태국보다 낮아…'물가 비싼 나라'는 옛말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나라 중 하나로 꼽혔다.
매년 전 세계 주요 도시 생활물가를 조사해 발표하는 미국 컨설팅업체 머서의 2012년 조사에서도 도쿄가 스위스 제네바, 노르웨이 오슬로, 미국 뉴욕 등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생활비가 비싼 도시로 선정된 바 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장기 침체로 일본 경제는 성장이 멈추다시피 했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과 물가수준을 반영한 구매력평가(PPP) 지수 등의 글로벌 순위도 계속 뒷걸음질 쳤다.
여기에 엔저 현상까지 가세하면서 달러로 환산한 각종 물가지수 조사에서 일본의 일부 생활물가는 태국이나 스리랑카 같은 개발도상국보다도 싸다는 결과가 심심찮게 나온다.
각국의 PPP를 비교하는 경제지표로 자주 활용되는 '빅맥 지수'가 2022년 1월 기준 일본은 3.38달러였지만 태국은 3.84달러, 스리랑카는 4.15달러로 일본보다 높았다. 한국도 일본보다 높은 3.82달러였다.
디즈니랜드 입장료도 일본이 가장 저렴하다.
2021년 8월 기준 도쿄 디즈니랜드의 입장료는 8천200엔인데 비해 미국 디즈니랜드는 1만4천500엔(엔화로 환산), 상하이는 8천824엔, 파리는 1만800엔 등으로 일본보다 비싸다.
저가 생활용품점 다이소 역시 일본에서는 100엔 균일가격으로 판매하지만 미국에서는 160엔, 뉴질랜드에선 270엔, 태국에선 210엔 등으로 같은 물건도 더 비싸게 팔린다.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의 나가하마 도시히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현상에 대해 최근 일본에서 화제가 된 '싸구려 일본'(安いニッポン)이란 책에서 "장기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기업이 가격을 올리는 메커니즘이 붕괴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오랜 불황에 시달린 일본 소비자들이 가격에 워낙 민감해 원자재 가격 상승 등 인상 요인이 발생해도 기업들이 좀처럼 가격을 올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passi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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