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는 러시아인 카이 카토니나(31)는 반전 시위에 참여하려다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전쟁에 반대하는 러시아인임을 분명히 알리고 싶었지만 러시아 국기를 드는 것은 자칫하면 러시아 정부의 선전이나 군부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카토니나와 친구들이 생각해낸 해법은 백색, 청색, 적색의 '삼색기'인 러시아 국기 가운데 맨 아래의 적색을 백색으로 바꾼 깃발을 만들어 시위에 나가는 것이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와 같은 '백청백기'가 세계 곳곳의 반전시위에 참여하는 러시아인들은 물론 '평화를 사랑하는 러시아인'을 지지하는 전 세계 시위자에게 널리 애용되고 있다고 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카토니나는 가디언에 "이 깃발은 삼색기 가운데 붉은색, 즉 현재 진행되는 유혈사태를 흰색으로 덮어씌운 것 같은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재미있는 것은 같은 시기에 전쟁에 반대하는 다른 러시아인들도 같은 깃발을 들고 시위 현장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라면서 "일종의 '무의식적인 협업'이 이뤄지고 있는 듯하다"고 밝혔다.
백청백기가 러시아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깃발은 아니다.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인 벨리키 노브고로드에서 이 깃발을 사용했다고 한다. 벨레키 노브고로드는 12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대의제의 역사를 지니고 있어 민족적 민주주의의 요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18년 벨라루스가 짧은 독립을 성취했을 때도 사용됐던 이 깃발은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에 재등장했다. 루카셴코 정권은 백청백 무늬의 양말까지 단속할 정도로 이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러시아 정부 역시 이 깃발에 대한 반감을 표시했으며 지난주 관리들은 '극단주의자'의 상징이라며 이 깃발의 사용을 금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 깃발은 러시아의 침공에 반대하는 집회에 자주 등장하게 됐고 이를 담은 사진과 영상도 SNS를 통해 널리 공감을 얻고 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를 비롯해 러시아의 시인, 예술가, 음악인들도 이 깃발의 사용에 지지를 표명했다.
해외 반체제 러시아인의 모임인 리투아니아 빌뉴스의 '자유러시아포럼'은 이 깃발을 "평화와 자유의 상징"으로 부른다. 이 단체는 "이 깃발은 러시아인을 크렘린궁의 집권자와 분리해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것은 국가의 상징이 아니라 함께하는 모든 사람의 상징"이라고 강조했다.
cwhyn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