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서 파키스탄·페루까지 식량·연료 등 물가 급등에 민심 폭발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코로나19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기간 경제 회복이 선진국보다 느렸던 신흥국들이 올해 전쟁 등 겹겹이 쌓인 악재로 위기를 맞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석유 등 연료와 식량 가격 급등으로 가뜩이나 높은 물가 상승률이 두 자릿수로 뛰어오르면서 신흥국 곳곳에서 대대적 시위와 정치·사회적 혼란이 일어났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공격적인 통화 긴축과 상하이 등 도시 봉쇄에 따른 중국의 급격한 성장 둔화도 신흥국을 위협하고 있다.
여러 악재가 동시에 몰려와 탈출구가 없는 '퍼펙트 스톰'이 닥치면서 경제위기가 세계 신흥국을 도미노처럼 덮치고 있는 것이다.
10일 외신들에 따르면 가장 먼저 벼랑 끝에 내몰린 곳은 인도양에 있는 인구 2천200만명의 섬나라 스리랑카다.
스리랑카는 1948년 독립 국가 수립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에 빠졌다. 관광산업에 의존하던 스리랑카 경제는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입은 데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원자재 가격 급등에 치명타를 맞았다.
무엇보다도 외화가 바닥나 석유를 구해오지 못하면서 화력발전소 가동이 중단돼 최악의 전력난을 겪고 있다. 거리의 가로등은 꺼졌고 종이가 모자라 학교 시험을 못 치르는 지경이다.
인플레이션도 아시아 최악 수준으로 스리랑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월에는 18.7%까지 치솟았으며, 특히 식품 물가는 30.2%나 뛰어올랐다.
분노한 시민들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가 진정될 조짐을 보이지 않자 수도 콜롬보 주요 지역에는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스리랑카 중앙은행에 따르면 3월 말 기준 스리랑카 외화보유고는 불과 19억3천만달러(약 2조4천억원)로 한 달 사이 16% 감소했다.
게다가 부채 상환 부담도 심각하다. JP모건 추산에 따르면 올해 스리랑카가 갚아야 할 부채는 70억달러(약 8조6천억원)에 달하며, 당장 7월에 해외 채권자들에게 10억달러의 국채를 상환해야 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스리랑카의 달러 표시 국채는 대부분 액면가의 40% 수준 헐값에서 거래되고 있다. 국채 가격이 급락하면서 국제 채무불이행(디폴트)이 불가피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통화 가치도 사상 최저로 폭락했다. 달러 대비 스리랑카 루피화 가치는 한 달 만에 40%나 곤두박질쳤다. 루피화는 지난 7일 달러당 310루피를 기록했는데 암시장 환율은 달러당 400루피에 이른다.
결국 외화 부족으로 국가 부도 위험에 빠진 스리랑카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겠다고 선언했다. 이와 함께 인도, 중국 등으로부터 긴급 자금을 동원 중이며, 대외 채무 재조정을 위한 자문단도 구성했다.
중동 국가 레바논은 지난 7일(현지시간) IMF로부터 30억달러(약 36조6천억원)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기로 했다.
레바논은 이미 국내총생산(GDP)이 2018년 550억달러에서 지난해 205억달러로 급감했다.
레바논 화폐인 파운드화 가치는 2019년 경제위기가 본격화한 이후 2년 만에 90% 이상 폭락했다.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에서 거의 모든 제품의 가격이 수직 상승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주 식량인 밀의 80%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하는 레바논에 결정타가 됐다. 밀값 급등과 외화 부족으로 레바논은 극심한 식량 위기에 직면했다.
파키스탄에서도 국제유가 급등과 극심한 정치적 혼란 속에 경제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파키스탄 중앙은행은 지난 7일 긴급회의에서 기준금리를 12.25%로 2.5%포인트 인상했다. 이런 인상 폭은 1996년 이후 최대다.
페루에서는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연료·비료 가격 급등이 촉발한 격렬한 반정부 시위로 5명이 사망했다.
페루는 연료 가격 상승에 항의하는 트럭 운전기사들의 고속도로 봉쇄 시위가 이어지자 지난 7일 30일간의 전국 도로망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경찰과 군이 도로를 통제하도록 했다.
페드로 카스티요 페루 대통령은 사임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시위가 끊이지 않자 최저임금 10% 인상을 결정했다.
페루는 물가 상승률이 1998년 이후 13년여 만에 최고치로 올라간 가운데 지난 7일 9차례 연속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이처럼 신흥국들의 경제 여건이 급격히 악화하자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신흥시장의 올해 실질 GDP 증가율 전망치를 종전 4.8%에서 4.0%로 하향했다.
한편 세계은행은 올해 아시아 국가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외에도 중국의 급격한 경기 둔화, 미국 금리 인상 등 3가지 큰 경제적 충격을 받을 수 있다고 지난 4일 예상했다.
세계은행은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올해 성장 전망치를 종전 5.4%에서 5.0%로 하향하고 상황이 더 악화하면 4%대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은행은 또 신흥국들의 국가부채 조달 비용이 늘어나고 있다면서 향후 12개월간 10여개국이 부채 상환에 실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y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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