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용사 스트링햄, 전장서 그린 60여점 한국전쟁유업재단에 기증
화가지망생, 핵물리학자로 변신…달라진 한국에 "믿을 수 없는 꿈"
(뉴욕=연합뉴스) 강건택 특파원 = 미국 캘리포니아미술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하던 22살 청년 병사는 틈만 나면 강원도의 산과 풍경, 미군 동료들의 생생한 모습, 다양한 작전 활동을 화폭에 담았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전선에서 구할 수 있었던 그림 도구는 맥주, 담배, 치약, 비누 등 보급품 상자 바닥에서 뜯어낸 종이와 연필 한 자루가 전부였다.
긴박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연필을 놓지 않은 것은 고향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 있는 부모님께 "나는 괜찮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편지를 부칠 때마다 한 장씩 동봉한 6·25 전쟁 스케치는 어느덧 60점을 넘었다. 모친은 아들의 스케치를 모아 1952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후 병사의 집에서 잠자던 스케치와 그가 1952년 일본으로 재배치된 뒤 물감으로 다시 그린 수채화 등 6·25 전쟁을 다룬 작품 60여 점이 9일(현지시간) 미 비영리단체인 한국전쟁유업재단(이하 유업재단)을 통해 7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유업재단이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로저 스트링햄(93)의 작품들은 백병전, 참호전, 폭격기, 추락한 전투기, 야간 순찰, 병사들의 이동 등의 장면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한국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스트링햄의 말대로 전장 주변의 풍경에만 집중한 작품도 많다. 한국을 떠나면서 배에서 본 마지막 광경들은 일본에서 여러 점의 수채화로 재탄생했다.
혼자 간직하던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한 것은 현 거주지인 하와이에서 지난 2월 이뤄진 한종우 유업재단 이사장과의 인터뷰에서였다.
국가보훈처의 지원으로 2012년부터 유엔 참전용사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사업을 진행 중인 한 이사장은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DPAA)의 유해감식반 활동을 다루는 교육자료집 제작을 위해 하와이를 찾았다가 스트링햄과 처음 만났다.
마침 그림의 영구적인 보관 장소를 찾고 있던 스트링햄은 유업재단 홈페이지에 한국전쟁 스케치와 수채화를 전부 옮겨놓는 게 "최고의 선택"이라며 한 이사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미 독립선언문과 헌법 등 4대 건국 문서에 모두 서명한 유일한 인물인 로저 셔먼과 유명 수학자 워싱턴 어빙 스트링햄의 후손인 그는 6·25 발발 후 미 육군에 징집돼 21보병사단 24연대 본부중대 소속으로 1951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인천에 내린 뒤 건물 하나조차 보이지 않는 해변에서 갯벌을 걸어 이동하던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강원도 화천호·금성 전투에 투입된 그와 동료 병사들은 혹독한 추위로 인한 동상으로 고생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듬해 3월 부대가 일본 센다이로 재배치되면서 한국을 떠난 스트링햄은 "센다이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한 일은 밖에 나가서 수채화용 종이와 물감을 산 것"이라며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70년도 넘은 옛일이지만 스트링햄은 "아직도 악몽을 꾼다. 죽은 동료들을 찾는 그런 꿈을 꾼다"라고 말했다.
전쟁을 겪고 미국으로 돌아간 그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전공을 바꿔 물리화학을 공부한 스트링햄은 100편 이상의 학술논문을 쓴 상온핵융합의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한국에서 열린 학회에도 여러 차례 초청받은 그는 "과거 완전히 부서진 나라의 과학기술 발전에 너무 놀랐다"면서 "인천공항, 서울의 마천루, 교통시스템을 보면서 '이건 믿을 수 없는 꿈을 꾸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라고 감탄했다.
한편, 6·25 참전 22개국 중 21개국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수집한 한 이사장은 이달 말 마지막 나라인 인도를 방문해 현지 참전용사들과 인터뷰할 예정이다.
한 이사장은 "참전용사 인터뷰를 교육자료집으로 만들어 전 세계 교사들에게 배포해 한국전쟁의 세계사적 의의와 한국의 전후 업적을 영구히 교육할 수 있는 공공 보훈외교의 자산으로 활용할 것"이라며 "미국과 영국에 이어 나머지 20개국에서도 한국전쟁 자료집을 제작하고 각국 교사들을 교육하겠다"고 말했다.
firstcircl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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