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르포] "눈앞 위기만 넘기려 한 정치권 때문에 더 망가졌다"

입력 2022-04-14 23:57   수정 2022-04-15 14:25

[스리랑카 르포] "눈앞 위기만 넘기려 한 정치권 때문에 더 망가졌다"
대통령 집무실 앞 시민들 "정치권 무능이 참사 불렀다" 분노
"가스도 없고 우유도 없고 설탕도 없다…구하려면 줄 서야"


(콜롬보=연합뉴스) 김영현 특파원 = "농업부 장관이 정작 농업을 모를 정도입니다. 민생에 대한 지식이 없는 정치인이 나라를 이끌다가 결국 이렇게 됐어요."
14일(현지시간)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 대통령 집무실 인근 시위 현장에서 만난 회사원 수하르타(30)는 최근 경제난은 오로지 정치권의 '무능'으로 인해 빚어진 참사라고 말했다.
수하르타는 "외환 보유고가 줄어들고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는데 정부는 돈(스리랑카루피)을 마구 찍어내고 세금을 줄이며 눈앞의 위기만 넘기려 했다"며 "이 때문에 정부 수입은 감소했고 경제는 더 망가졌다"고 정치권을 질타했다.
인근에서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 기한 불라트신하라게(29)도 "경제 위기의 원인은 지식과 지도력이 부족한 정치인이 나라를 이끈 데서 비롯됐다"며 "20년 전, 30년 전 정치인이 다시 나라를 이끌다가 망쳐놨다"고 맞장구쳤다.
현재 스리랑카는 1948년 독립 이후 최악이라고 평가받는 경제난에 처했다.
경제난에다가 1주일간의 신년 연휴까지 겹치면서 콜롬보의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은 물론 거리에서도 차량이나 인적이 드물었다.
기름이 없으니 차를 타고 다니는 이가 줄었고 대중교통 운행도 상당 부분 마비됐다는 최근 언론 보도가 실감 났다.
시내가 적막한데도 대통령 집무실 인근에만 수천명의 인파가 몰려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예 '장기전'에 대비한 시위 텐트촌까지 자리 잡았다.


대통령 중심제에 의원내각제를 가미한 정치 체제를 운용 중인 스리랑카에서는 동생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과 그의 형 마힌다 라자팍사 총리를 필두로 한 라자팍사 가문 출신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다.
라자팍사 가문은 2005∼2015년에도 독재에 가까운 권위주의 통치를 주도했으며 2019년 대통령 당선으로 재집권에 성공했다.
스리랑카 경제는 2019년 '부활절 연쇄 폭탄 테러', 2020년 코로나19, 올해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어지면서 무너져내렸다.
외국인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핵심 외화 수입원이었던 관광 산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관광산업 수입이 2018년 44억달러(약 5조4천억원)에 달했지만 지난해 2억6천만달러(약 3천200억원)로 추락했다. 국내총생산(GDP)도 2018년 880억달러에서 2020년 807억달러로 10% 가까이 쪼그라들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중국과 일대일로(一帶一路: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벌이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상태라 이 같은 위기를 버텨낼 나라 곳간과 경제 체력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와중에 정부는 민생을 살리겠다며 돈을 찍어내고 감세 정책을 폈다. 한편으로는 일부 품목들의 수입을 제한했다.
하지만 물가는 급등했고 재정적자는 심화하는 등 상황은 오히려 갈수록 악화했다. 3월 물가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18.7%나 폭등했다.
그러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거세져만 갔다.
콜롬보의 호텔에서 근무하는 사디스(48)는 "예년에는 지금같은 연휴 때라면 호텔 객실의 70∼80%가 찼지만 지금은 20%도 안 찬 상태"라며 "물가는 두세배 뛰었지만 임금은 그대로라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시장 상인 찬더너 반더러(55)는 "정부는 손을 쓰지 못하고 있고 무역상이 중간에 착복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농민과 일반 상인이 버는 돈은 매우 적다"고 했다.
이젠 외화가 동나면서 석유 외 다른 생필품 수입도 사실상 막힌 상태다. 의약품이 없어 시급하지 않은 수술은 연기됐고 종이가 없어 학교 시험도 미뤄졌다.
시내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수닐(52)은 "가스도 없고 우유도 없고 설탕도 없다"며 "이 모든 것을 구하려면 줄을 서야 하는 지경"이라고 했다.

시내에서는 문을 연 주유소만 북적였다. 차량과 오토바이가 길게 줄을 선 채 기약 없는 대기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카순(33)은 "쌀값이 3년 전보다 두세 배 올랐다. 안 오른 게 없다"면서 "강제 단전의 경우 하루 13시간까지 늘었다가 인도에서 지원한 발전 연료가 도착하면서 최근 조금 나아졌지만, 연휴가 끝나면 다시 나빠질 것"이라며 희망이 안 보인다고 한다.
경제난에 몰리던 정부는 결국 지난 12일 대외 채무에 대해 '일시적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지원이 이뤄질 때까지 510억달러에 달하는 대외 채무를 갚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정부는 현재 인도, 중국, IMF 등의 지원을 통해 경제 위기 타개에 나서겠다고 하지만 과정이 험난할 것이라는 관측이 일반적이다.


cool@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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