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처 비공개·유용 의구심…정치자금단체에 '셀프 기부'하기도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본 국회의원에게 지급되는 거액의 '눈먼 돈'을 두고 시끄러웠지만, 개혁 논의는 결국 용두사미가 되는 양상이다.
논란의 대상은 한달에 100만엔(약 970만원), 일 년으로 따지면 1천200만엔(약 1억1천700만원)을 지급하는 '문통비'(文通費)'다.
문통비는 국회의원이 공문서를 발송하거나 공적인 성격의 통신 혹은 교통비 등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의원 급여인 세비와 별도로 지급되는 돈이다. 정식 명칭은 '문서 통신 교통 체재비'. 원활한 의정 활동을 지원하는 비용이다.
작년 가을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 초선의원과 낙선한 의원들에게 재직 일수와 상관없이 한 달 치 문통비가 전액 지급된 것에 대해 야당인 일본유신회가 문제 삼으면서 논란이 확산했다.
10월 31일 투표로 당선된 초선의원에게 10월 한 달 치 문통비를 지급한 것이다.
낙선한 의원도 중의원 해산(10월 14일) 때까지 재직했다는 이유로 10월분 전액을 받았다.
단 하루만 의원직을 유지해도 한 달 치를 지급한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개혁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사용처를 공개하거나 쓰고 남은 돈을 반환할 의무가 없는 것도 문제로 지목됐다.
의정 활동과 상관없이 쓰더라도 이를 감시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문통비가 '제2의 세비'라고 불릴 정도였다.
일본유신회는 세금으로 조성된 돈을 쓰면서 용처를 밝히지 않는 것은 문제라며 사용 내용을 이례적으로 공개했는데 이들이 자발적으로 공표한 자료에서도 제도의 허점이 보인다.
예를 들어 이치무라 고이치로 중의원 의원의 작년 12월분 사용 명세를 보면 교통비 등 본래 취지에 맞게 사용된 것은 극히 일부였다.
문통비의 대부분인 86만엔 남짓이 이치무라 의원이 대표를 맡은 정치자금 관리단체에 기부됐다.
다른 의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의정 활동에 필요한 교통비나 통신비가 아니라 셀프 기부 등을 통해 정치자금으로 쓰는 셈이다.
문통비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용 내용을 공개한 정당의 실태가 이러니 공개하지 않은 정당에는 더 심각한 사례가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든다.
비판에 직면한 정치권은 제도 개선을 공언했다.
재직 일수에 맞게 지급하고 사용 내용 공개와 미사용분 반환 의무를 부여하면 될 것인데 정치권은 논의에 몇 달간 시간을 끌다가 단숨에 법을 개정했다.
관련 규정을 담은 '국회법' 개정안과 '국회의원의 세비, 여비 및 수당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이달 14일 중의원에 제출해 찬성 다수로 가결하고 15일에 참의원에서 역시 찬성 다수로 가결했다.
개정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사용 내용 공개와 미사용분 반환 의무는 반영되지 않았다. 여야는 앞으로 이를 더 논의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하루만 의원직을 유지해도 한 달 분을 주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을 의식했는지 재직 일수에 비례해서 지급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는 초선 의원이 당선된 첫 달에만 영향을 미친다.
재선이 유력한 현직 의원의 경우 받는 돈이 조금 줄어드는 정도다.
중의원 해산으로 중간에 의원직이 종료하는 경우나 사망으로 직을 상실하는 경우 한 달 치를 다 지급하도록 예외를 뒀다.
문통비의 명칭을 '조사 연구 홍보 체재비'로 바꿔 용도를 사실상 확대했다.
의원들이 멋대로 쓸 수 있는 여지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
취지에 맞게 제대로 쓰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 요구의 핵심 중 하나였는데 공적 감시는 피하면서 더 쓰기 좋게 바꾼 셈이다.
소수파인 일본공산당은 사용 내용 공개와 미사용분 반납을 논의해야 한다며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나머지 주요 정당들이 법 개정에 찬성했다.
유권자의 눈총 속에 최대한 특권을 지키기 위해 일본 여야가 단합한 셈이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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