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제재 익숙한 이란 "핵합의 절박하지 않아"
고유가·대중원유 수출로 숨통 틔어…협상 '강대강' 교착상태 지속
(테헤란=연합뉴스) 이승민 특파원 = 교착 상태에 빠진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복원을 위한 회담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서방과 이란의 핵협상은 9부 능선을 넘었다고 평가됐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새 국면을 맞았다.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로 국제유가가 급등해 원유 판매 수입이 늘면서 이란 경제에 숨통이 트인 것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미국의 '최대 압박' 정책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이에 적응해 나름의 생존방식을 찾았다는 점도 이란이 합의를 서두르지 않는 배경으로 보인다.
이란과 미국은 혁명수비대의 외국 테러 조직(FTO) 지정 철회와 '제재 부활 방지 보증' 등 사안을 놓고 막판에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 우크라 전쟁·국제유가 고공행진에 '배짱'…"제재 회피 능숙"
로이터 통신은 5일(현지시간) 올해 유가 폭등이 이란 정부의 수입을 증가시켰고, 이는 경제난을 겪는 이란에 몇 달간 숨을 돌릴 여지를 줬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전면적인 원유 수출 제재에 맞서 이란은 '회색시장'을 통한 원유 판매에 역량을 집중해왔다.
회색시장은 생산자의 공식 유통채널을 벗어나 물건이 매매되는 통로로, 불법 암시장과 달리 불법과 합법의 중간 지대를 일컫는다.
이란은 과거 미국의 제재를 피해 제재 대상인 이란 국영석유회사가 아닌 민간 기업을 통해 환적·원산지 변경 등의 방법으로 국제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원유를 수출한 경험이 있다.
이란은 공식적으로 원유 수출량을 공개하지 않지만, 최근 이란 석유부 관리는 하루 150만 배럴의 원유가 수출되고 있으며, 이는 대부분 중국으로 향한다고 밝힌 바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국제유가는 지난 3월 배럴당 139달러까지 치솟아 2008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예멘 반군 후티의 사우디아라비아 정유시설 공습도 유가 상승을 부채질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지하드 아주르 중동·중앙아시아 국장은 "수십 년간 제재를 받아온 이란은 제재에 적응했고, 이를 회피하는 데에도 능숙하다"며 "이란의 원유 생산 증대와 고유가는 수입 증대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 이란 "핵 프로그램 계속 진행…시간은 우리 편"
로이터는 복수의 이란 관리를 인용해 이란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핵협상을 서두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란 고위 관리는 "우리의 핵 프로그램은 계획대로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란 경제가 핵합의 복원에 그다지 목매지 않는다는 것은 협상 테이블에서 이란 대표단에 큰 레버리지로 작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18년 핵합의를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대이란 제재를 복원했다. 이란은 이에 맞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제한하고 우라늄 농축 농도를 60%까지 높였다.
정치 컨설팅업체 유라시아 그룹의 헨리 롬 선임연구원은 이란이 장기간 지속되는 혼란을 통제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동시에 제재 해제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롬 선임연구원은 "개선된 이란의 국내 생산과 미국 제재의 한계,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서방의 혼란 등 요인은 이란 지도자들이 핵합의 복원에 절박하지 않게 된 이유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로이터는 핵심 쟁점에서 강하게 대치 중인 이란과 미국이 교착에 빠진 협상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인 밥 메넨데스 의원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이란 핵합의와 관련해 "나쁜 합의(bad deal)보다는 '노딜'(no deal)이 낫다는 것을 (조 바이든) 행정부가 이해하길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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