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전 장기화 배후엔 러 정교회 수장 "서방과의 성전"

입력 2022-05-26 11:36   수정 2022-05-26 11:37

우크라전 장기화 배후엔 러 정교회 수장 "서방과의 성전"
"러 정신적 구심점, 푸틴 무비판 추종해 '전쟁올인' 부채질"
푸틴 "생산적 협력" 감사…"국영TV처럼 정권 일부로 전락"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기자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과정에서 전 세계에 1억1천만 명의 신자를 거느린 러시아 정교회가 침략전쟁을 지지하며 입안의 혀처럼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 논란이 가열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기독교 교단인 동방정교회에 속했으면서도 세속의 일에 거리를 두기는커녕 러시아 국민을 전쟁으로 몰고 가는 행태를 보여서다.
25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동방정교회 내부에선 러시아 정교회 수장인 키릴(75) 총대주교의 행보와 관련해 격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러시아인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불리는 키릴 총대주교가 올해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서방에 맞서는 '성스러운 투쟁'을 외치며 전쟁을 독려하는 모습을 보인 탓이다.
그는 우크라이나를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도덕적·종교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가 하면, 지난달 초에는 우크라이나 소도시 부차에서 민간인 수백명이 러시아군에 학살된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침공을 두둔하고 애국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러시아 정교회가 운영하는 TV 채널에선 평화주의를 배격하고 전쟁을 옹호하는 설교가 방송됐다. 이와 관련해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키릴 총대주교가 집전한 미사에 참석해 "정부와 생산적 협력을 진전"시킨 데 개인적 감사를 표했다.
동방정교회에 속한 주교 중 명목상 으뜸인 바르톨로메오스 1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키릴 총대주교의 이런 행보를 거세게 비판했고, 러시아 내에서도 정교회 성직자 273명이 3월 1일 전쟁반대 성명을 내는 등 반발이 일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 당국은 이번 전쟁을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다르지 않다고 비난한 정교회 신부를 기소해 벌금형에 처하는 등 이러한 움직임을 거세게 탄압하고 있다.
일각에선 키릴 총대주교가 푸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옛 소련 정보기관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 출신이란 해묵은 의혹도 재조명되는 분위기다.
194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키릴 총대주교는 1970년 현지 신학대학을 졸업한 이후 꾸준히 입지를 키워 2009년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에 올랐다. 정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1990년대 공개된 옛 소련 비밀문건을 바탕으로 그가 실은 KGB 요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WSJ은 키릴 총대주교가 성직에 몸담은 초기에는 오히려 러시아 정교회가 KGB와 연계됐다는 의혹을 불식하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989년)을 반대하는 등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그러나, 총대주교가 된 직후 당시 총리였던 푸틴 대통령을 만나서는 소련 붕괴 후 경제 혼란을 극복한 주역이자 "신이 준 기적"이라고 추켜올렸고, 이후로는 정부 입장을 거의 그대로 추종해왔다.
한때 키릴 총대주교 아래에서 러시아 정교회 월간지 편집자로 활동했던 세르게이 차프닌은 러시아 정교회는 현재 국영 TV나 기업과 다르지 않은 정권의 일부가 됐다면서 "이런 결합이 어떻게 교회를 (권력에) 순종적이고 도덕이 결여된 존재로 만들었는지 보는 건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
hwangch@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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