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론시나[우크라이나]=연합뉴스) 현혜란 특파원 = 카트리나(14)와 마리아(8)는 돌아가신 아빠의 기일을 모른다. 아마도 한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2022년 3월 초가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과 아내 나탈리아(41)를 마을 밖으로 대피시키며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던 세르게이 모졸(50)은 실종 석 달이 지나 가족 품에 주검으로 돌아왔다.
세르게이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40㎞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 콜론시나가 러시아군에 포위됐던 지난 3월 초 가족을 보내고 혼자 마을에 남았다.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으로 마을 통신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 가족과 하루에 5시간 동안만 연락이 가능했던 세르게이에게서 소식이 끊긴 것은 3월 4일 무렵.
세르게이는 마을을 포위한 러시아군의 동향을 파악해 우크라이나군에 정보를 비밀리에 전달하는 일을 했다.
전쟁 전에는 보석을 사고파는 사업을 하며 평범한 삶을 살았던 세르게이는 전쟁이 터지자 마을에 남은 주민 200여명으로 꾸려진 일종의 향토방위대의 일원이 됐다.
그날도 정찰하러 밖으로 나갔던 세르게이는 늦은 밤까지 돌아오지 못했고, 마을 한구석에서 그가 몰았던 시트로엥만이 빈 채로 발견됐다고 한다.
2월 28일 마을을 에워쌌던 러시아군이 3월 30일 물러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온 나탈리아는 향토방위군이 있는 마을 회관을 찾아갔다.
남편이 실종됐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울부짖으며 행방을 찾았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사냥용 총에 의지한 채 마을을 지켰던 향토방위대는 러시아군이 떠나고 세르게이처럼 사라진 마을 주민을 백방으로 찾아 나섰다.
탐지견을 데리고 적게는 6명, 많게는 10명씩 조를 짜 인근 숲을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흔적을 찾아 헤매기를 두 달 반.
나탈리아는 러시아군이 버리고 간 다연장 로켓포 옆에서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시신은 무척 부패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나탈리아는 옷차림만 보고 남편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연락이 끊긴 지 103일째 되던 날이었다.
세르게이는 하늘을 바라본 채 20∼30㎝ 깊이의 차가운 땅 아래에 잠들어 있었다.
나탈리아는 남편을 찾고 나서 사흘 뒤인 17일(현지시간) 가족이 10년 넘게 살았던 집 앞 마당에서 장례를 치렀다.
세르게이가 잠든 관은 짙은 녹색 천으로 질끈 묶인 채 아이들이 뛰어놀던 트램펄린과 농구 골대 사이에 뉘어있었다.
그의 장례식에 모인 가족과 친구, 마을 주민의 흐느끼는 소리가 위령곡에 섞여 들려왔다.
러시아군의 총부리 아래 살아야 했던 콜론시나에서 사라진 주민은 총 10명. 세르게이를 마지막으로 실종됐던 모든 주민을 찾아냈다.
시신 중엔 열네 살짜리 아이도 있었다. 어떤 시신은 손톱이 빠져있었고 총탄이 관통한 무릎뼈도 나왔다. 마을 주민들은 이들이 러시아군에게 고문을 당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세르게이를 발견한 안드레이(52)는 "러시아군이 참호를 파놓고 주둔했던 숲속에서 지금까지 40여구의 시신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가족이 사라졌다고 신고한 마을 주민이 아니면 DNA 검사로 신원을 확인해 가족의 품에 돌아갈 수 있도록 경찰에 신고했다.
시신이 누군지 알 수 없을 때에는 키, 복장, 신체 특징 등을 적어 텔레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한다.장례식 전날에도 글이 하나 올라왔다.
"키이우 지역에서 러시아군이 살해한 민간인 시신이 또 나왔다. 손이 묶인 채 고문을 당했다. 키는 180㎝ 정도에 검은색 청바지, 검은색 재킷을 입고 있다. 신발 크기는 43이고 조커와 독수리 모양 문신이 있다."
러시아군이 물러간 지 석 달 가까이 지났지만, 향토방위대가 파헤치고 다닌 숲에서는 요즘에도 하루가 멀다고 시신이 나온다고 한다.
장례식 내내 말문을 열지 않던 나탈리아는 남편이 잠들 묫자리에 흙을 흩뿌리고 나서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남편은 이제 이곳에 잠들었습니다. 혹시나 세르게이가 여러분께 저지른 잘못이 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길 바랍니다"
세르게이는 생전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장례식에서 만난 그의 오랜 벗은 "살면서 이렇게 마음이 착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했다.
run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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