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전까지 6차례 엑스포 개최로 '세계의 문화 수도' 도약
1889년 엑스포 상징물 에펠탑, 문화예술계 반대와 철거 위기 견디며 생존
'오스만식' 도시개발, 지하철·하수도망 건설도 엑스포가 주된 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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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 에펠탑, 알렉산더3세 다리, 그랑 팔레, 프티 팔레, 나중에 미술관이 되는 오르세역. 모두 파리를 찾는 관광객이 우선순위로 꼽는 방문지이자 '인증 샷'의 필수 코스이지만 이들 명소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바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 세계박람회(엑스포)를 계기로 지어진 시설이라는 점이다.
이미 18세기 말부터 유럽 국가들 사이에선 자국의 기술력과 문화 수준을 과시하기 위해 국내 박람회를 개최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그 흐름을 선도한 것이 프랑스였다. 그러나 이를 국제적인 행사로 승격시킨 것은 1851년 런던 하이드파크의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개최된 '대전시'(Great Exhibition)가 처음이다. 세계박람회의 효시가 된 이 행사에서는 산업혁명의 본산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첨단 산업기계는 물론 현대의 팩스와 기압계의 원조 격인 각종 장비에서 당시 세계 최대라고 일컬어진 인도산 다이아몬드에 이르기까지 온갖 진기한 전시물이 대영제국의 욱일승천하는 기세를 뽐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항상 영국에 질 수 없다고 생각하던 프랑스는 당장 4년 뒤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나폴레옹 3세 주도로 두 번째 국제 규모 엑스포를 개최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1937년까지 세계박람회가 무려 다섯 차례나 더 프랑스에서 열렸다. 일련의 행사를 통해 프랑스는 영국에 못지않은 산업 강국의 면모와 함께 높은 문화적 소양을 만천하에 과시할 수 있었다. 또 주최국으로서 전시 운영에 관해서도 국가별 전시관(Pavilion) 개설 등 참신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놓아 향후 개최되는 엑스포에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이 기간 프랑스에서 열린 여섯 차례의 엑스포를 모두 개최한 파리는 행사 때마다 새로운 시설이 들어서고 도시의 수준이 업그레이드돼 명실상부한 '세계의 문화 수도'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파리의 엑스포를 이야기할 때 절대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에펠탑이다. 프랑스 정부는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 행사를 상징할 기념물을 공모했다. 제시된 조건은 샹드마르스 광장 북단에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 구조물인 300m 높이의 탑을 개최 연도인 1889년까지 2년 남짓한 기간에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전 세계 어디에도 300m는커녕 200m 높이의 인공 구조물조차 없었다. 심사에서는 만장일치로 에펠의 설계안이 채택됐다. 예술적인 요소보다는 주어진 기간에 건설할 수 있는 것은 철탑뿐이라는 기술적 측면과 현대 문명을 대표하는 건축 재료로서 석재보다는 철재가 더 상징성이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센강변의 기초 위에 쌓은 에펠탑이 점점 높아지면서 비판 여론도 커졌고 사생결단하듯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에펠과 맞수였던 건축가 가르니에를 비롯해 소설가 뒤마와 졸라, 작곡가 구노 등 내로라하는 예술가들 300명이 "프랑스 예술과 역사의 이름으로 우리의 수도 한가운데에 백해무익하고 추악한 탑을 세우는 것에 항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여곡절 끝에 완공된 후에도 에펠탑을 보기 싫어했던 작가 모파상이 파리 시내에서 그것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장소인 탑 안의 레스토랑에서 매일같이 식사했다는 풍문이 나돌 만큼 에펠탑을 향한 조롱과 비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철거될 위기도 여러 번 닥쳐왔다. 당초 계약에 따라 박람회가 끝난 후 20년 동안 입장료 수입을 올린 뒤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역시 논란 끝에 전파 송수신용 탑으로서 효용을 인정받아 살아남았다. 히틀러의 선의 때문인지, 널리 알려진 대로 나치가 파견한 파리 행정 책임자의 애정 때문인지 불분명하지만 유럽의 주요 도시가 초토화된 2차 대전의 전란 속에서도 에펠탑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건축공학이라는 말조차 낯설었을 그 시절에 15만 개의 강철 부품과 250만 개의 나사를 레고 쌓듯 조립해 만든 이 구조물이 130년 이상 안전에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버텨온 것이 더 놀라운 일일 수도 있다. 예술가로서는 몰라도 엔지니어로서 에펠은 천재라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에펠탑뿐만 아니라 파리 곳곳에는 엑스포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00년 엑스포를 위해 지은 그랑 팔레와 프티 팔레, 그리고 두 시설과 강 건너 본행사장을 연결하는 알렉산더 3세 다리가 대표적이다. 그해 엑스포는 역사상 단일 행사로는 가장 많은 4천800만명 이상의 관객이 다녀갔으며 이 막대한 관객을 수송하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튀일리궁 건너편에 서남부 지역과 연결되는 철도 노선의 시발역인 오르세역을 세웠다. 엑스포 폐막 후 쇠락해 철거 직전까지 갔던 이 역은 1986년 기차역의 기본적인 구조를 그대로 살린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프랑스 미술의 최전성기라고 할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의 작품들을 주로 전시하는 오르세 미술관은 짧은 시간 안에 루브르에 이어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는 세계 유수의 미술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1937년 엑스포를 위해 지어진 시설 가운데는 에펠탑 맞은편 샤요궁과 그 동쪽 도쿄궁이 지금도 남아 박물관, 전시장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엑스포가 파리에 남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전시용으로 건축된 건물과 상징물만이 아니다. 좁고 비위생적인 중세 시골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한 파리를 현대적 도시로 변모시킨 '오스만식 도시개발'은 상당 부분 엑스포를 찾는 외빈들에게 멋진 파리를 보여 주고 싶다는 나폴레옹 3세의 욕심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유명한 파리의 하수도망이나 다른 유럽 선진국보다는 늦었지만 지금은 세계 어느 도시에 못지않게 촘촘하게 펼쳐진 지하철망의 건설도 전적으로 엑스포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로 인해 큰 추진 동력을 얻게 된 것은 분명하다. 여섯 번의 엑스포를 치르면서 파리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파리 코뮌 내전,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헤밍웨이가 '날마다 축제'라고 묘사할 정도로 활력이 넘치는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재탄생을 거듭했다.
대한민국의 제2 도시 부산도 국제박람회기구(BIE)의 '등록 엑스포'로는 국내 최초가 될 2030 부산 엑스포 유치에 나섰다. 정부와 부산시는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의 도시, 어떤 계획을 세울 틈도 없이 팽창해 버린 이 도시를 리모델링하는 계기로 엑스포를 활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고 한다. 파리의 예를 보면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cwhy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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