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핫버튼' 눌리자 찬반 시위·격론장으로 변한 美 대법원 앞

입력 2022-06-25 07:23  

[르포] '핫버튼' 눌리자 찬반 시위·격론장으로 변한 美 대법원 앞
낙태권 폐기 판결에 분노와 환호 교차…더 깊어진 미국의 균열
"이번 판결, 관에 박은 첫번째 못…결국 성소수자 권리까지 갈 것"
"생명은 어떤 경우에도 생명…낙태는 그 생명을 죽이는 것"




(워싱턴=연합뉴스) 강병철 특파원 = "태아의 생명이냐, 여성의 인권이냐"
낙태를 합법화한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이 약 50년만에 공식 폐기된 24일(현지시간) 워싱턴DC의 대법원 앞에서는 낙태 문제로 갈라진 미국의 균열상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거론하기만 해도 바로 감정 섞인 싸움으로 번지기 때문에 미국에서 이른바 '핫 버튼(hot button)' 이슈로 불리는 낙태 문제에 대해, 대법원이 법 제도적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는 핵폭탄급 결정을 내리면서다.




이날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서 대법원의 판결이 알려지자 대법원 앞은 충격과 환호로 극명하게 나뉘었다.
지난달 초 유출됐던 판결문 초안대로 낙태가 헌법적 권리가 아니라는 결정을 놓고 낙태권 옹호 지지자들은 아연실색하였지만, 낙태 반대 지지자들은 샴페인을 터트리며 웃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판결이 난지 4시간 정도 뒤인 오후 2시 찾은 대법원 앞 거리에서는 여전히 낙태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대의 분노에 찬 구호가 울려 퍼졌다.
"내 몸은 나의 선택", "우린 되돌아갈 수 없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 들을 외치는 수백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리사 킴벌리(70)씨는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다고? 절대 안 돼'라고 쓰인 녹색 스티커를 나눠주고 있었다.
킴벌리 씨는 "이제 여성이 불법 낙태로 죽는 시대로 돌아가게 됐는데도 이를 '프로 라이프(pro-life·생명 친화적)'라고 한다"면서 "프로 라이프라는 것은 거짓말이고 여성의 선택을 중단시키려고 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건 나치가 관뚜껑에 박은 첫 번째 못"이라면서 "낙태권 다음은 피임이 될 것이고 다시 동성 결혼 문제를 거쳐 성 소수자 권리까지 갈 것"이라면서 이 판결이 다른 권리에 미칠 파장을 우려했다.



전체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20대 존 씨도 비슷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클래런스 대법관의 보충 의견을 보면 대법원은 낙태 권리를 제한하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면서 "다른 권리도 위험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토머스 클래런스 대법관은 이날 보충 의견에서 피임과 동성혼, 동성 성관계 등에 대한 기존 판례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는데 이를 거론한 것이다.
대법원에서 승리를 쟁취한 낙태 찬성 지지자들이 이날 오후에는 많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분홍색 옷을 입은 카라 줍커스씨는 '나를 밟지 마세요(Dont tread on me)'라는 글귀와 태아가 그려진 패널을 들고 여전히 대법원 판결을 옹호하고 있었다.
패널의 '나를 밟지 마세요'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 깃발에 사용됐던 표현으로 자주 '자유 우파'의 상징으로 쓰인다.
영아메리칸재단(YAP)의 대변인이기도 한 줍커스씨는 '성폭력 등으로 원치 않은 임신을 했을 경우에도 낙태를 금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나 역시 성폭력 희생자이지만 생명은 생명"이라면서 "어떤 이유로 임신이 됐든 간에 여전히 생명은 생명으로 가치를 가진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출산 후에) 입양 등 다른 많은 선택지가 있다"고 말했다.



시위 현장에서는 낙태 찬반론자간 열띤 논쟁도 벌어졌다.
'태어나지 않은 생명도 중요하다'는 패널을 들고 있던 댄 씨도 낙태 찬성 지지자들에게 질문 공세를 받자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설명했다.
자신을 '댄'으로만 써달라고 한 그는 피임 자체에 대해 반대하느냐는 질문에 "피임 반대는 아니다"라면서 "피임은 생명이 생기는 것을 막는 것이지만, 낙태는 이미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폭력 등으로 원치 않게 임신하게 됐을 경우에 대해서는 "전체 낙태 사례 중에 그런 사례는 드문데다 주별로 만드는 법안에 그에 대한 예외 조항이 있다"면서 "현실적으로 50개 주 전체에서 낙태가 금지되는 것도 아니다"고 밝혔다.



이들과 달리 낙태 지지자들은 태아가 생명이라는 주장에는 기준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존 씨는 "세포의 집합을 인간으로 규정할 때 어느 시점을 규정할지에 대해서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낙태 찬반을 놓고 두 진영은 정면으로 대립했지만 우려했던 폭력 시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이 있었던 직후에는 경찰이 두 시위대를 분리했으며 시위는 이후에도 대체로 차분하게 진행됐다.
그러나 이번에 대법원 판결이 뒤집히면서 전선이 50개 주로 확대됐기 때문에 앞으로 양측간 대립은 더 격화될 전망이다.


킴벌리씨는 낙태를 합법화한 콜롬비아를 거론하면서 "그 나라는 가톨릭 국가인데도 수백만 명의 여성이 시위하면서 우리보다 더 나은 낙태 권리를 갖게 됐다"면서 "거리로 나와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DC도 시위 격화를 우려해서 경계를 강화한 상태다.
대법원 앞에서도 경찰들이 시위 상황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한국 언론사들이 일부 입주해 있는 내셔널프레스 빌딩의 경우 시위가 격화하는 것에 대비해 1층 상가 출입문과 창문에 합판을 설치하는 공사를 하는 등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만만의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0년 5월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처음인 것으로 알려진 프레스센터빌딩의 합판 설치는 미국으로 정치적 폭풍이 몰려오고 있는 것을 암시하는 모습이었다.



solec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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