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심의 피하며 실질적으로 한국 영업하는 스팀도 한몫
(서울=연합뉴스) 김주환 기자 = 글로벌 최대 PC 게임 플랫폼 스팀(Steam)에서 한국어를 지원하는 성인용 게임이 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차단되자 게이머들 사이에서 반발이 거세다.
28일 연합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게임물관리위원회는 이달 말 '미심의 성인 게임이 한국어로 유통되고 있다'는 취지의 민원을 접수한 것을 계기로, 스팀 운영사인 밸브에 '오크 마사지', '인큐버스' 등 게임의 국내 접근을 차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밸브는 게임물관리위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 이용자들이 해당 게임을 구매할 수 없도록 '지역 차단' 조치를 내렸다.
당장 철퇴를 맞은 것은 소수만 즐기던 일부 성인향 게임뿐이지만, 게임물관리위의 이런 행보가 앞으로 광범위한 외국산 게임 유통 규제와 실질적인 검열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반응이 게이머들 사이에서 나온다.
◇ "판단 기준은 한국어 지원·심의 통과 가능 여부"
게임물관리위가 해외 플랫폼에서 유통되는 미심의 게임에 대해 국내 차단을 요청하는 기준은 '한국어 지원'과 '내용상 심의 통과 불가능' 등 2가지에 동시에 해당되는 경우다.
위원회 설명에 따르면, 미심의 게임이 한국어를 지원하더라도, 등급분류 절차를 밟으면 국내 발매가 무리 없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경우에는 위원회가 지역 차단을 요청하지 않는다.
또, 그대로 출시될 경우 국내 정서상 '등급분류 거부'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은 게임이라도, 한국어를 지원하지 않으면 위원회가 굳이 차단을 요청하지 않는다
이번에 문제가 된 인디 게임들은 두 조건 모두에 해당한다. 내용은 성행위 묘사 외에는 이렇다할 콘텐츠가 없는 포르노에 가깝다.
'오크 마사지'는 제작진이 한국어 버전을 공식 지원하고 있고, '인큐버스'는 공식 한국어 버전은 없지만 다른 이용자가 제작한 한글 패치를 제작진이 직접 안내하고 있다.
게임물관리위 관계자는 "한국어를 지원하는 게임은 등급분류 여부와 무관하게 국내 유통이 목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며 "단순히 성인용 게임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단 요청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체 모니터링도 하고 있지만, 해외 플랫폼에서 유통되는 게임이 매우 많은 만큼 민원이 들어온 게임 위주로 들여다본다"고 설명했다.
◇ 국내 규제 피하는 스팀-제도권 끌어들이려는 게임물관리위
논란에는 스팀 운영사 밸브가 심의 관련 규제를 회피하며 국내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 기업인 밸브는 중국을 제외하고는 미국 외에 별도의 해외법인을 두지 않고, 현지 심의는 유통사가 알아서 해당 국가에 받도록 한다.
일례로 밸브의 대표작 '하프 라이프', '포탈', '카운터 스트라이크' 시리즈의 심의 신청도 밸브 본사가 아니라 실물 패키지를 유통하는 국내 업체들이 해왔다.
국내 법인은 없지만, 밸브의 한국 시장에 대한 관리는 세심하다. UI(유저 인터페이스)를 비롯해 각종 행사 페이지까지 손수 번역한 한국어로 제공하고 있고, 등급분류를 받지 않은 2020년 작 VR 게임 '하프 라이프 알릭스'도 한국어판을 제공한다. 토스·카카오페이 등 한국 금융 플랫폼을 통한 결제도 지원한다.
하지만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게임산업법)에 따르면 등급분류 없이 게임을 유통하는 행위는 '불법게임물 유통'에 해당한다.
게임물관리위로서는 스팀에 있는 모든 미심의 게임을 차단 요청할 법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할 소지가 없지 않으나,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고 있다.
스팀이 국내 PC게임 유통 시장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국내 게임사들도 스팀에서 게임을 퍼블리싱하는 만큼 전면 차단하기에는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명확히 합법도 아니고 명확히 불법도 아닌 이런 상황을 밸브도 잘 알고 있어, 개별 게임을 게임물관리위가 문제삼아 차단 요청을 할 경우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팀보다 후발 주자인 에픽게임즈는 국내 법인인 에픽게임즈코리아를 설립하고, '에픽게임즈 스토어'를 통해 국내 서비스하는 게임들을 모두 등급분류받고 있다. 전체·12세·15세 이용가 게임은 자체등급분류사업자로서 자율심의를 한다.
게임물관리위는 밸브 측에 에픽게임즈처럼 자체등급분류사업자 신청을 하고, 18세 이용가 게임에 대해 정식으로 심의를 받으라고 지속적으로 안내하며 권유하고 있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 정부가 주도하는 통제·차단 위주 심의, 선진국서 찾아보기 힘들어
논란의 근본적인 원인은 선진국 중 유사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관(官)이 주도하는 통제와 차단 위주의 게임 심의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15세 이용가 이하 게임물은 게임콘텐츠등급분류위원회를 통해 심의를 받거나 자체등급분류사업자가 자체 심의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18세 이용가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게임은 반드시 게임물관리위의 심의를 받도록 하고 있다.
현행 게임물관리위 위원 명단을 봐도 '학계·법조계·문화예술계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고, 정작 게임을 만들어 유통하는 게임업계 출신 인물은 없다.
반면 미국의 ESRB, 일본의 CERO, 유럽연합의 PEGI 등 게임물관리위와 유사한 해외 심의 기구들은 정부가 아닌 민간 업계가 주도해 설립한 심의 기구다.
주요 유통사와 콘솔 게임 플랫폼이 모두 가입돼 있기 때문에, 이들의 심의를 거치지 않고 소매점이나 콘솔 플랫폼을 통해 게임을 출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기에 참여하지 않는 플랫폼을 통해 개인이나 기업이 게임을 사고판다고 해서 정부당국이 이를 규제하지는 않고 있다.
외국산 성인용 게임 역시 별도의 성인인증 절차만 거치도록 하고 있다면, 소비자의 접근 자체를 차단하지는 않는다.
juju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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