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노역' 감추고 미화…"지옥섬 아니다" 박물관에 역사왜곡 자료
한국측 오류 트집 잡아 "우리가 인권 침해당했다" 적반하장 주장
나가사키市 '조선인 강제노역' 배제…"일본 정부와 한 몸"
(하시마·나가사키=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주택 임차료는 무료였습니다. 급료는 공무원의 2∼3배였다고 합니다."
일본 나가사키현에 있는 군함도(정식 명칭 하시마)에서 현지 유람선업체 소속 가이드가 군함도가 한때 "일본의 미래상이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며 섬 주민의 경제적 여건에 관해 방문객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이나 중국인을 상대로 자행된 강제 노역이나 인권 침해의 실상을 방문객에게 알리는지 확인하기 위해 기자는 1일 오전 나가사키항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군함도에 상륙했다.
하지만 '강제'는커녕 '조선인'이나 '중국인'이라는 단어조차 들을 수 없었다.
◇ 군함도 가보니 자랑 일색…조선인 강제노역 설명 안해
일본 정부가 강제 노역을 포함한 전체의 역사를 알리겠다고 공언하고 군함도를 세계문화유산에 올린 지 7주년을 나흘 앞두고 있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군함도 등재를 결정한 2015년 7월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사토 구니 당시 유네스코 주재 일본 대사는 "일본은 1940년대에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도 징용 정책을 시행하였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가이드의 설명은 일제 강점기가 아닌 1945년 일본 패전 이후에 집중됐으며 섬에 대한 자랑 일색이었다.
그는 "TV, 냉장고, 세탁기는 쇼와 30년대의 '3종 신기'였다. 이곳에서는 대부분 (가정에 이들 세 가지가) 갖춰져 있었다. 특히 TV는 100%였다고 한다. (중략) 이런 문화적인 생활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쇼와(昭和)는 1926년 말부터∼1989년 초까지 사용된 일본의 연호이고, 3종 신기(神器)는 거울, 칼, 굽은 옥 등 일본의 왕위를 상징하는 보물로 여겨지는 물건이다.
1955∼1964년 당시로서는 꽤 귀한 TV, 냉장고, 세탁기가 널리 보급될 정도로 군함도 주민의 생활 수준이 높았다는 설명인 셈이다.
군함도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얘기를 늘어놓음으로써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발붙일 공간을 없애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이드가 "이 섬에는 뭐든지 있었다"며 주점, 당구장, 마작장, 파친코, 파출소, 유치장 등을 열거하자 일부 방문객이 "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는 "없는 것이 2개 있었다. 무덤과 화장터였다"면서 사망자가 생기면 나카노시마에서 화장을 한 뒤 고향으로 보내지만 인수할 사람이 없는 유골은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했다는 취지로 설명하기도 했다.
나카노시마는 군함도에서 직선거리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섬인데, 노역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은 조선인이 다수 화장된 곳이다.
혹시 조선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귀를 쫑긋 세웠지만, 설명은 거기까지였다.
다른 가이드는 "기온이 30도 이상이고 습도는 95%, 낙반(천장이나 벽의 암석이 떨어지는 일)의 위험성, 폭발의 위험성이 있었다"고 해저 탄광의 열악한 작업 환경을 설명하기도 했으나 군함도가 일본의 근대화를 떠받친 자랑스러운 섬이라는 취지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기자가 군함도를 방문한 것은 세계유산에 등재 직전인 2015년 6월, 등재 약 1년 후인 2016년 7월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유람선 업체는 매번 달랐지만, 이들이 설명하는 방식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군함도에 얽힌 일제 강점기 어두운 역사는 전혀 설명하지 않고 특이한 점이나 흥미 위주의 사실에 초점을 맞췄다.
현장의 안내판에는 "하시마 탄광은 세계유산 일람표에 기재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구성 자산의 하나"라며 "산업혁명유산은 1850년대부터 1910년 일본 중공업(제철·제강, 조선, 석탄산업)에서의 큰 변화, 국가의 질을 바꾼 반세기의 산업화를 증언하고 있다"고 기재돼 있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방문객은 폐허가 된 콘크리트 건물로 가득한 군함도를 특별한 느낌을 주는 신기한 여행지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상륙 견학을 마치고 유람선으로 돌아온 여행객들은 군함도를 배경으로 인생샷이라도 남기려는 듯 밝은 표정으로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 조선인 숙소 66호 건물 균열 심화…붕괴 진행 중
세계유산인 군함도는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군함도는 인공 방호벽과 반복된 매립 작업을 통해 확장·유지됐으나 1974년 폐광과 더불어 무인도가 되면서 풍파에 노출된 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건축한 지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100년을 넘긴 철근 콘크리트 건물은 붕괴가 진행 중이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 숙소의 균열이 수년 사이에 심각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1940년에 만들어진 4층짜리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인 '66호' 등 복수의 건물이 조선인의 숙소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섬의 북쪽이나 북서쪽에 몰려 있다.
하지만 견학용 통로 및 광장은 섬의 남서쪽에 있어서 방문자가 이들 건물에 직접 접근할 수 없다.
기자는 66호 건물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유람선이 군함도 주변을 돌 때 사진을 촬영했다.
2015년 6월 5일에 마찬가지 방식으로 찍어 둔 사진과 비교했더니 옥상의 난간 구조물 일부가 넘어졌고, 벽면의 균열이 늘어난 것이 확인됐다.
2016년 7월 1일 찍은 사진과 비교해보니 해안 쪽에 접한 창틀 주변의 콘크리트가 더 떨어져 나가고 철근 노출이 심해진 것도 확인됐다.
방문자들이 섬에 상륙해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7층짜리 30호 건물은 7년 전보다 확연하게 훼손이 심해졌다.
이 건물은 1916년에 만들어진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로 군함도를 대표하는 구조물로 소개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역사 전문가인 다케우치 야스토 씨의 설명에 따르면 30호 건물은 노무 동원이 본격화하기 전인 1920년대 무렵 하청업체 소속으로 군함도에서 일했던 조선인의 숙소로도 사용됐다는 기록이 있다.
종합 사무소로 사용된 붉은 벽돌 건물 뒤쪽에 금속 지지대가, 제2갱구로 이어지는 계단 아래에는 금속으로 된 버팀기둥이 각각 설치돼 있었다.
근처에서 안전모를 쓴 사람 여럿이 작업 중이었다.
가이드는 "여기가 없어지면 이 섬이 무엇을 위한 섬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석탄을 캐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며 "여기만 보수가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 "조선인 스스로 왔다…지옥섬 아니다" 왜곡된 정보 전시
기자는 군함도를 방문하기 이틀 전 다른 유람선 업체가 나가사키항 근처에 군함도를 주제로 2015년 개관한 디지털 뮤지엄(박물관)을 찾아갔다.
해설 담당 직원이 군함도의 역사를 설명하는 도중 "하시마에는 1910년 한일 병합 이전에도 한반도 출신자 등이 많이 있었다. 1916년에는 가족과 함께 온 사람을 포함하면 100명 이상이 살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스스로 혹은 모집에 의해 일하러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조선인에 관해 언급했다.
또 태평양 전쟁 때 군함도에 살았던 주민의 발언이라며 "탄광 일은 가혹한 것이었지만 하시마 탄광에서는 조선 출신자도 일본인도 함께 일을 했다"고 덧붙였다.
'조선인이 차별을 받거나 폭행을 당하면서 중노동에 시달렸다'는 학자들의 연구 결과나 군함도에 동원된 피해자의 증언과 해설 내용이 다른 것 같다고 직원에게 말을 건넸더니 소책자를 하나 가지고 왔다.
책자는 조선인 강제 노동을 부정하는 관변 단체인 '산업유산국민회의'의 협력을 받아 '진실의 역사를 추구하는 하시마 도민의 모임'이 발행한 것이었다.
표지에 "누가 역사를 날조하고 있는가? 군함도는 지옥섬은 아니다"고 적혀 있었다.
한때 한국 교과서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사진으로 실렸으나 1926년 홋카이도 도로 건설 현장에서 벌어진 학대치사 사건을 다룬 일본 지방지에 실린 조선인과 무관 사진으로 뒤늦게 판명된 사례나 강제 연행된 조선인의 모습으로 소개됐으나 1961년 후쿠오카의 갱도에서 촬영한 것으로 드러난 남성의 사진 등 한국 측의 오류 사례도 다루고 있었다.
책자는 전쟁 중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모두 '일본인'으로서 힘을 모아 석탄을 캤다면서 한국 측의 거짓 정보로 인해 "우리들은 당사자로서 인권 침해를 당했다고 느끼고 있다"는 적반하장의 주장을 싣고 있었다.
한국 측의 일부 오류를 트집 잡아 일제 강제 동원의 강제성 자체를 부정하고 군함도에서 조선인 차별이 없었던 것 같은 이미지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책자를 구성한 것이다.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남긴 증언이나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를 충분히 접하지 못한 방문자들은 교묘하게 편집된 이 책자를 보고 '한국이 일본을 비방하는 허위 선전을 일삼고 있다'고 치부할 것이 우려됐다.
해설 담당 직원은 "우리는 도쿄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가 제시한 자료를 가지고 (군함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반도 출신 피해자들의 증언은 왜 소개하지 않으냐는 물음에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것은 전시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 나가사키시 '조선인 강제노역' 설명 배제…"정부와 한 몸"
민간 시설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군함도를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나가사키시 역시 역사 왜곡에 동참하고 있었다.
군함도 방문을 마친 뒤 나가사키시가 운영하는 '군함도 자료관'에 가봤더니 군함도를 미화하는 전시물이 많았으며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관한 자료는 없었다.
현장에 있던 스태프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여기서는 아무것도 답할 수 없다"며 나가사키 시청에 문의하라고 반응했다.
그래서 구리와키 요시로 나가사키시 세계유산실장에게 물었다.
그는 한반도 출신자에 관한 내용은 도쿄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에서 모아서 다룬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라며 나가사키시는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관한 자료는 전시하지 않고 있으며 현재로서는 이를 다룰 별도의 계획이 없다고 설명했다.
강제 노역을 포함한 전체의 역사를 알리겠다는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유네스코가 유감을 표명한 점 등에 관해서는 "일본 정부 측에서 지금 (대응 방안을) 재검토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나가사키시가 자체적으로 관련 정보를 제공하면 정부의 견해와 다르게 될 우려가 있다는 인식을 표명하고서 "그러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에 일본 정부와 한 몸이 돼 움직인다"고 덧붙였다.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물은 조선인 강제 노역이나 이들에 대한 가혹행위 등을 부인하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
집권 자민당 주요 인사와 친분이 있으며 군함도를 세계유산에 올릴 때 실무를 총괄한 우익 성향의 가토 고코가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센터장을 맡고 있다.
산업유산정보센터 측이 제공하는 역사 왜곡 자료가 군함도 소재지인 나가사키 일대의 전시 내용까지 사실상 좌우하는 셈이다.
세계유산에 군함도를 올린 지 7년이 됐지만, 일본은 민관 합동으로 철저하게 약속을 외면하고 있었다.
sewonle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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