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합뉴스) 고일환 특파원 = 핵심 지지자들은 열광했지만, 브레이크가 풀려버린 칠레 개혁 세력이 결국 손에 쥔 것은 뼈저린 패배였다.
얼마 전만 해도 칠레 정치권에서 개혁의 물결을 거스를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2019년 칠레 사회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학생시위는 결국 '피노체트 군부 독재의 유물'로 불리는 헌법에 대한 개정 결정을 이끌어냈다.
지난해 5월 실시된 제헌의회 선거에서 155석 중 당시 우파 여당은 37석(23.9%)을 건지는 데 그쳤고, 나머지는 좌파 연합과 좌파 성향의 무소속이 가져갔다.
당시 칠레 유력지 엘 메르쿠리오는 사실상 무소속으로 분류되는 당선인이 전체의 절반을 넘는 88명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변화와 개혁에 대한 칠레 국민의 열망이 기존 정치인 대신 신선한 무소속 정치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학생시위대의 상징으로 불렸던 지오반나 그란돈(47)도 개혁 열풍에 힘입어 수도 산티아고에서 제헌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무소속 정치인이다.
스쿨버스 운전기사로 네 자녀의 어머니였던 그란돈이 학생 시위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의상 때문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포켓몬의 캐릭터 피카츄 차림으로 시위에 참가한 것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화제가 되면서 하루밤 사이 스타가 됐다.
'피카츄 아줌마'라는 별명도 붙었다.
특별한 정치적 경력이 없지만 새 헌법 만들기라는 중책을 맡게 된 그란돈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핵심 지지층의 성원에 보답했다.
피카츄 차림으로 의회 본회의장에서 출석해 연설한 것이다. 공룡 캐릭터도 동반한 상태였다.
'정치를 코미디로 만드냐'는 비판이 일었지만, 그는 '지지자의 요구'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거리에서 함께 투쟁한 국민에게 자신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피카츄 아줌마' 이외에도 제헌의회에 투입된 '젊은 피'의 돌출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녹색당 계열 정당에 소속된 한 초선 의원은 목욕을 하면서 동영상으로 진행된 회의에 참석해 투표까지 한 사실이 알려져 사죄 성명을 내기도 했다.
특별한 정치 경력 없이 개혁 돌풍 덕에 쉽게 당선됐지만, 자질 부족이라는 약점을 감추지 못한 셈이다.
칠레 국민도 결국 등을 돌렸다.
4일 실시된 개헌 찬반 국민투표 개표 결과 찬성 38.1%에 불과했고, 반대는 61.9%(개표율 99.9%)로 집계됐다.
물론 헌법 개정안에 낙태 전면 허용 등 칠레의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에 맞지 않는 급진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도 압도적인 반대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제헌의회 의원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빼놓고선 이 같은 결과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칠레 정치전문가인 마르코 모레노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개헌안 내용보다 문제였던 것은 개헌안이 만들어졌던 과정"이라고 말했다.
제헌의회 소속 정치인들의 수준 낮은 행태가 국민을 질리게 했다는 것이다.
국민투표 결과가 발표된 이후 좌파 학생운동 지도자 출신인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은 "국민의 목소리를 겸허히 듣겠다"면서 개헌 노력을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언젠가 칠레 국민은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겠지만, 피노체트 군부 독재의 유물인 현행 헌법도 일단 생명을 연장하게 됐다. 자신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자질 부족 정치인이 스스로 부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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