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서 찾아온 인파에 주변 공원까지 가득…검은 옷 아닌 나들이 차림
"오래 훈련받은 찰스 3세 잘 할 것"…장례일 임시공휴일 발표에 반색
(런던=연합뉴스) 최윤정 특파원 = 8일(현지시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서거한 뒤 첫 주말, 전국에서 추모객이 모여들며 버킹엄궁 주변은 인산인해였다.
10일(현지시간) 이른 오전 버킹엄궁으로 향하는 지하철 빅토리아 선의 전철은 꽃다발을 든 승객으로 빈자리 없이 가득 찼다. 그린파크 역에 도착하자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전철에서 내렸다. 가족, 친구들과 삼삼오오 역에서 내린 뒤 모두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린파크 역은 버킹엄궁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이다.
행렬에 휩쓸려 가다 보니 트래펄가 광장 인근에서 버킹엄궁까지 이어지는 약 1㎞ 직선 도로 '더 몰'이 나타났다.
이 길엔 양옆으로 통제선이 설치됐고, 그 주변으로 추모객이 몇 겹으로 겹쳐 서 있었다.
인파 규모, 분위기, 파란 하늘 모두 석달 전 6월 같은 장소에서 치러진 플래티넘 주빌리를 연상케했다. 영국은 불과 석 달 전 여왕 즉위 70주년을 기념했고 당시 여왕이 버킹엄궁 발코니에 모습을 나타냈었다.
석 달전처럼 추모객이 계속 늘어나는 바람에 길이 막혀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국왕이 지나갈 예정이어서 버킹엄궁 쪽 진입을 막아뒀다고 했다.
그래도 다들 1952년 이후 처음 새로운 국왕을 직접 본다는 기대에 큰 불만없이 받아들이는 듯했다. 70년 만에 벌어진, 말 그대로 '세기의 이벤트'의 목격자들인 셈이다.
찰스 3세 국왕은 여왕 서거 후 군주 자리를 자동승계했지만 국왕으로 공식 즉위 선포는 10일 오전에 이뤄졌다.
함께 기다리던 한 장년 여성은 "오늘 국왕을 보게 되면 플래티넘 주빌리 때 샀던 여왕 깃발을 흔들려고 가져왔다"면서 "여왕 깃발이 지나친 게 아닌가 싶어서 망설였는데 와서 보니 많이들 갖고 있더라"라고 말했다.
여왕을 추모하러 온 길이 예상치 않게 고된 여정이 된 탓인지 한 여성 노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응급처치를 받는 소동도 있었다.
드디어 왕이 탄 자동차가 단출한 호위를 받으며 버킹엄궁으로 달려가자 수천명이 일제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고 환호 속에 '(국왕) 만세'와 '하느님, 국왕을 보호하소서'(God Save the King)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여왕 서거 다음 날만 해도 아직 입에 붙지 않아서 예전처럼 '찰스'라고 이름만 부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금세 이제 다들 '킹'(King)으로 부르고 있었다.
국왕이 지나간 뒤에 통제가 다소 풀리면서 인파는 버킹엄궁 빅토리아 메모리얼을 등대 삼아 흘러갔다. 마침내 버킹엄궁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는데 상황이 전날과는 매우 달랐다. 담장 근처로는 접근할 수 없었고 멀찍이 미디어 센터 주변에 헌화할 공간이 따로 생겼다.
버킹엄궁 주변이 온통 혼잡해 짜증스러울 법도 했지만 '여왕의 백성들'은 내색하지 않고 각자의 방법으로 추모하고 있었다.
런던에서 기차로 2시간여 떨어진 서머싯 지역에서 딸과 함께 왔다는 리아 씨는 꽃 위에 스카우트 스카프를 고이 올려놨다.
그는 "스카우트에서 10년째 봉사를 하고 있는데 여왕이 후원자이기 때문에 감사를 전하려고 왔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교사인 데이비드 씨는 꽃과 여왕 그림을 두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는 "웨일스 중부에서 새벽 6시에 출발해 4시간 반 차를 몰고 왔다"면서 "여왕에게 존경을, 새 국왕에게 환영인사를 보내고 학생들이 그린 그림을 전하려고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새 국왕이 훌륭한 여왕 밑에서 오래 훈련을 받았고 군주제 현대화를 계속해갈 수 있는 인물이며, 환경보호에 관심이 많아서 좋아한다"고 말했다.
찰스 3세가 현실 정치에 개입할 것이라는 전망을 묻자 "왕세자 때와는 역할이 달라졌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전부인 다이애나비 얘기를 꺼냈더니 "젊었을 적에 서로 불운한 결정을 한 것이고 지금은 서로 좋아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답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버킹엄궁 주변은 추모객은 더 많아졌다. 그린파크 역과 버킹엄궁 사이에 있는 그린파크 공원을 가로질러 사람으로 된 강이 흐르는 것 같았다.
국내 뿐 아니라 캐나다나 호주와 같은 영연방국에서 온 추모객도 있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도 있었다.
줄이 너무 길어 궁에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에 공원 안 나무 아래에 꽃을 모아두기도 했다.
시민들은 평생 봐 온 여왕을 떠나보내게 돼 슬프다며 숙연한 모습이면서도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여왕이 비극적으로 급사하지 않고 천수를 누리며 평안하게 안식한, 한국식으로 말하면 '호상'이기 때문인 듯했다.
나들이 나온 것 같은 시민들의 밝은 옷차림은 동시에 새 국왕에 대한 기대의 표현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플래티넘 주빌리 때처럼 영국 국기 유니언잭을 온몸에 휘감은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한 남성이 유니언잭 무늬 모자를 좌판에 깔고 공원 입구에서 팔았지만 장사가 잘 안되는 것 같았다.
여왕에 대한 추모는 19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엄수되는 장례식에서 정점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영국에서 여왕의 존재, 군주제의 존속은 언제나 뜨거운 논쟁거리여서 영국인 모두 한 마음일 수는 없을 것이다.
플래티넘 주빌리 때처럼 이날 버킹엄궁 앞에도 백인의 비율이 다른 인종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지난주 새로 발표된 내각 고위직 4인방에 백인 남성이 한 명도 없을 만큼 영국은 변화하고 있다.
이날 추모객 중에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경기까지 취소한 것은 너무하다는 얘기가 들렸고 여왕을 '공식적으로' 떠나보낼 19일 장례일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된다는 발표를 소시민들은 크게 반겼다.
오래 준비한 공연을 이날 올릴 예정이라는 한 극장의 홍보 담당자는 "군주제가 영국에선 잘 맞는다"면서도 "큰 공연 등이 취소된 일도 있어서 행여나 공연을 못 하게 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고 말했다.
merci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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