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경제 힘든데 여왕 장례에 세금을 왜"…스코틀랜드의 '차가움'

입력 2022-09-12 10:39   수정 2022-09-12 16:06

[르포] "경제 힘든데 여왕 장례에 세금을 왜"…스코틀랜드의 '차가움'
에든버러서 장례식 시작…운구행렬 전날 로열마일 도로 엄격히 통제
스코틀랜드서 분리독립 여론 고조…역사적으로도 잉글랜드와 불화


(에든버러[스코틀랜드]=연합뉴스) 최윤정 특파원 = 여름철 에든버러는 날마다 축제다.
세계적 공연예술 축제 에든버러 페스티벌이 여름 내내 시내 곳곳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도시 이곳저곳이 관광객으로 북적여야 할 테지만 이곳에 도착한 11일(현지시간) 오후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열흘간 치러지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이 이날부터 에든버러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에든버러 페스티벌의 중심지이자 대표적 관광지 로열마일 곳곳엔 철제 울타리가 세워졌고 경찰이 촘촘히 배치돼 통행을 막았다.
로열마일은 에든버러성과 훌리루드 궁전을 잇는 약 1마일(1.6㎞) 길이의 도로다.
길 양쪽으론 스코틀랜드 캐시미어나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과 식당들이 빽빽하고 스코틀랜드 전통 복장을 한 호객꾼이 백파이프를 불고 기념사진을 찍어주며 돈을 받곤 한다.
그러나 이날은 비까지 내려 분위기가 한층 더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여왕이 여름철 거처인 스코틀랜드 북동부 밸모럴성에서 서거해 에든버러가 장례식의 시작점이 됐다.
이날 오전 여왕의 관은 6시간여에 걸쳐 운구차로 에든버러의 여왕 공식 거처인 홀리루드 궁전으로 옮겨졌다.
여왕의 관은 이날 로열마일을 통과했고 12일엔 다시 로열마일을 따라 성 자일스 대성당으로 옮겨진 뒤 대중에게 처음 공개될 예정이다.

어둠이 깔리자 경찰의 형광색 겉옷은 더욱 두드러져 보이고 관광객보다 경찰 숫자가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내가 휑했다.
에든버러의 적막은 그러나 여왕의 서거를 애도하는 숙연함이라고 하기엔 너무 차가웠다.
추모 열기가 한껏 달아오른 런던과 달리 거리의 상점에 여왕의 사진과 추모 메시지를 볼 수 없었고 버스 정류장 광고판에 여왕 사진이 크게 붙어있지도 않았다.
기념품 가게에도 여왕 관련 기념품이나 영국 국기 유니언잭은 없었다. '세기의 이벤트'인 여왕의 첫 장례가 시작되는 도시인만큼 '대목'을 노려 구색을 갖출 만도 할 텐데 평소와 다름없었다.
로열마일에서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모퉁이에 있는 햄버거 가게 직원 알렉스 씨는 "오후에 운구차가 지나갈 때는 그래도 사람이 많았다"며 약간 높은 곳에 있는 식당에서 유리창 너머로 찍은 사진과 영상을 보여줬다.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장면을 온전히 본 것인데도 알렉스 씨는 시큰둥해 보였다. 바로 하루 전 런던 버킹엄궁 앞에서 만난 이들이었다면 흥분에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국민당(SNP) 지지자라는 한 40대 여성은 "젊은 사람들은 군주제에 큰 관심이 없다"며 "여왕을 좋아하는 사람이 절반, 아닌 사람이 나머지 절반인 것 같다"고 말했다.
SNP는 영국 연방에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추진하는 집권 여당이다.
스코틀랜드는 2014년에 독립투표까지 했다가 55대 45로 부결됐으나 최근 다시 독립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SNP가 작년 5월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서 과반을 차지한 것도 이런 여론을 방증한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자신들의 뜻과 달리 중앙정부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를 강행한 점을 표면적인 독립 사유로 들고 있다.
그 이면엔 잉글랜드와 한 나라지만 실은 혈통도 다르고 피로 얼룩진 전쟁을 치른 역사적 불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로열마일 기념품 가게 '올드 에든버러'의 여성 매니저는 "TV에서 보니 런던 버킹엄궁 앞엔 추모객이 많이 모이고 다들 매우 감정적인 것 같더라"라며 "잉글랜드 사람들이 과잉 반응하는 것 같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사람들도 여왕을 좋아했고 갑자기 서거해서 슬퍼했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며 "운구차가 올 때 사람이 잠시 많았지만 지나가자마자 바로 싹 사라졌다"고 말했다.
여왕이 스코틀랜드에서 서거하고 에든버러에서 첫 장례 행사를 하면서 스코틀랜드와 인연이 깊어졌으니 분리독립 움직임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단박에 "네이"(nae·아니오)라고 했다.
"여왕이 어쩌다가 스코틀랜드에서 세상을 떴기 때문에 에든버러에서 장례행사를 하는 것일 뿐이지 런던에서 죽었다면 스코틀랜드에는 오지도 않았겠죠."

런던 출신으로 이번 가을 에든버러대 공대에 입학한다는 한 남학생은 왕실은 물론 여왕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는 "일반 국민은 에너지 요금 급등으로 살기 어려운데 여왕 장례식에 큰돈을 들이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제국주의, 인종차별주의 등을 열거하며 영국의 군주제를 비판했다. 여왕이 영국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고 하자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특히 미성년자 성폭행 의혹이 있는 앤드루 왕자 사건을 언급하며 "여왕이 소아성애자를 감싸고 돌았다"고 맹비난했다.
물론 스코틀랜드에도 '여왕의 팬'은 있겠지만 차갑게 식은 에든버러 거리에선 쉽게 만날 수 없었다.
merciel@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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