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서 돈 버는 사람은 남자라는 관념으로 법 만들어져"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스위스 연금법에 남성을 부당하게 차별하는 조항이 있으며 이는 유럽인권규약 위반이어서 법적으로 무효라는 판결이 유럽인권법원(ECHR)에서 나왔다.
이에 따라 스위스 정부는 유사한 경우에 대해 그간 부당하게 미지급해 온 연금을 지급하고 연금법을 개정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유럽인권규약에 서명한 회원국은 46개국으로, 유럽연합(EU) 회원국들과 스위스 등 EU 회원국이 아닌 일부 국가들이 포함돼 있다.
ECHR 대재판부는 11일 '벨러 대 스위스' 사건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밝히면서 선고 영상과 함께 판결문과 이를 해설하는 보도자료를 공개했다.
현행 스위스 연금법에 따르면 부부 중 남편이 먼저 사망했을 경우 과부가 된 여성은 평생 연금을 받도록 되어 있으나, 부부 중 아내가 먼저 사망했을 경우 홀아비가 된 남성은 18세 미만의 자녀가 있는 기간까지만 연금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런 조항은 가정에서 돈을 벌어 오는 사람은 남자라는 관념에 입각한 것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대재판부는 설명했다.
이 사건은 2020년 10월에 ECHR 일반 재판부에서 원고 승소 판결이 재판관 7명 전원일치로 나왔으며, 대재판부는 스위스 정부의 이의제기로 이 사건을 다시 심리했다. ECHR 대재판부는 중요 사건만 골라 선별적으로 다루는 곳으로, 재판관 17명으로 구성된다. 대재판부는 스위스 연금법의 해당 조항이 유럽인권규약의 차별 금지 조항을 위반한 것이라는 일반 재판부의 결론을 유지했다.
ECHR에 따르면 스위스 국민인 막스 벨러의 부인은 1990년대 초반에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부부 사이에는 2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각각 생후 1년 9개월, 4년여였다.
부인 사망 당시 41세였던 벨러는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본인 직장을 그만뒀다. 생활비는 배우자가 사망한 경우 받을 수 있는 연금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2010년 막내딸이 만 18세에 이르면서 연금 지급이 중단됐다.
벨러는 스위스 국내 법원에 소송을 냈고 스위스 연방대법원까지 갔으나 2012년 패소했다. 당시 스위스 법원은 해당 연금법 조항의 입법 취지상 남자가 돈을 벌어서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이 반영돼 있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이번 사건 피고인 스위스 정부는 "자녀를 돌봐야 하는 홀아비들은 자녀들이 성인이 된 후에는 일을 다시 시작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자녀를 돌봐야 하는 과부들은 그렇지 아니하다"라는 취지의 주장을 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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