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콧대 높은 영국에서 K컬처 인기와 냉랭한 현실

입력 2022-10-14 07:07  

[특파원 시선] 콧대 높은 영국에서 K컬처 인기와 냉랭한 현실
한국 대중문화·한식 관심 급증…한류 열기에 비해 영국내 기반 부족


(런던=연합뉴스) 최윤정 특파원 = 최근 영국에선 한류 온도가 높아지는 것이 실제로 느껴질 정도로 한국 대중문화와 한국을 향한 관심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핫도그, 떡볶이 등 한국 분식을 파는 가게들이 들어서고 영국인들의 입맛에 맞춘 한국 음식점도 새로운 이름이 계속 들린다.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빅토리아앤앨버트(V&A) 뮤지엄에서 한류에 관한 전시를 하고 기념품 숍에서 한글이 적힌 후드티나 김치 등 식품까지 판다.
윤여정 씨의 위트 넘치는 영어 수상소감에 콧대 높고 고상한 체하는 영국인들이 꼼짝 못 하고 웃었고 런던 시내 지하철역엔 박해일과 탕웨이가 등장하는 영화 '헤어질 결심' 광고가 크게 붙어있다.
손흥민 선수가 경기에서 골을 넣고 이기면 토트넘 팬들이 태극기 옆에 와서 같이 사진을 찍고 "손을 보내줘서 고맙다"고 인사한다.
영국 언론에 한국 대중문화 소개 기사가 자주 나오면서 이제는 혹시 부정적인 내용이 있는지나 훑어보게 된다. BBC 요리 프로그램에 태극기와 함께 한식이 등장해도 그러려니 하게 된다. 서점엔 북한이 아닌 한국에 관한 책도 늘고 있다.
영국은 프랑스에 비하면 K컬처 유행이 늦은 편이라고 하는데 코로나19 중에 집에 갇혀서 넷플릭스와 유튜브 등이 떠 먹여주는 콘텐츠에 반강제로 노출되면서 급격히 붐이 일게 된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때 김치가 건강 음식으로 주목받고 집밥을 많이 해 먹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면서 한식까지 관심을 받게 됐다.
영국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알고리즘에 따라 한국 영화, 드라마나 K팝에 빠져든 사람들도 상당히 많고 그 정도는 아니라도 최소한 남들이 재밌게 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 전에 한국 대중문화 인기가 서서히 올라가다가 기생충과 BTS를 계기로 주목을 받은 것이 기반이 됐다.
일부 영국인들은 '틱톡'을 타고 한류가 퍼졌다며 다소 깎아내리듯 말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엔 높은 연령대에서도 한류에 관심이 적지 않다.
영국에서 한국인 혹은 한국계로 지내기는 몇 년 전과는 꽤 다르다고 교민들도 전한다. 특히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이후 영국이 아시아로 기우는 전략을 세우고 한국을 주요 파트너로 눈여겨보면서 영국 정부의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얼마 전 런던의 외신기자협회 행사에서 만난 기자들과의 대화에서도 한국의 달라진 위상과 이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유럽의 선진국부터 아시아 가까운 나라까지 모두 한국의 빠른 성장과 대중문화 확산에 관해 언급했다.
독일 기자는 "삼성은 애플과 맞먹는 휴대전화 제조사이고 현대차의 아이오닉도 좋더라"라고 말했고 폴란드 기자는 "한국은 자체 브랜드 자동차를 생산하는 나라"라고 했다. 핀란드 기자는 "K팝 인기가 대단하다"고 했다. 또 코로나19 때 한국보다 확진자가 훨씬 많고 의료서비스 접근이 편치 않은 영국에서 지내는 게 불안했다고 하자 브라질 기자는 "우리는 정반대였다"고 했다.
북한 미사일에 관한 질문은 없었다.
듣기 좋은 말만 했을 수 있지만 이 정도면 어디 가든 당당히 한국이라고 들이밀어도 될 것 같았다.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더는 개도국이라고 주장하며 발을 빼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에 긴장도 됐다.

그러나 한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아직은 냉랭한 현실이 보인다.
런던 금융가에 있는 국내 한 대표 금융기관의 지점장은 현재 직원 20여명인데 앞으로 늘릴 계획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그런데 그 사무실 창문 너머 거대한 건물에 있는 일본계 은행은 직원이 2천500여명이라고 했다.
일본 한 통신사 특파원은 런던 중심가에 있는 사무실에 근무하는 인력이 현지 직원까지 포함해 25명이라고 했다. 일본 특파원들은 워낙 많아서 총리실 외신 브리핑 등에서 만나면 그제야 서로 인사를 하기도 한다. 영국에 한국 주요 언론사 특파원은 연합뉴스 1명이다.
얼마 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 행사 취재 중에 지정된 취재구역으로 가던 중 일본 특파원을 만났다. 영국 정부가 지도에 없는 지명으로 위치를 알려준 탓에 함께 잠시 헤매다가 그 일본 특파원은 "신청을 한 어시스턴트에게 다시 확인해보라고 해야겠다"면서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정보라 작가가 일본 작가와 함께 후보에 오른 부커상 시상식 현장에는 일본어를 하는 영국인 기자가 나왔다. 일본과 영국의 특수관계를 고려해도 극심한 차이다.
한동안 런던 금융가에서 일하는 한국 주재원들의 고민은 우수 인력 확보였다. 코로나19 이후 브렉시트 여파 등으로 인력난이 심해지고 몸값이 뛰는데 한국의 인건비 기준으로는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려워서다. 몇 년 가르쳐둔 우수 인력이 떠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볼 수밖에 없고 새로 데려오기도 쉽지 않다고 호소했다.

한류 열기도 좋은 일이긴 하지만 가끔은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받는다'는 말이 떠올라 씁쓸해진다.
올해 영국에서 한 주요 K팝 콘서트 중 한 건은 싱가포르 업체, 다른 한 건은 중국계 영국 업체가 기획했다. 런던의 한국 화장품 가게 중 한 곳도 사장이 동남아계다.
런던 사치 갤러리에서 한국 아이돌, 배우 등의 그림을 전시하는 행사를 하고 올해 독일에서 수만명이 관람한 K팝 콘서트를 기획한 인사도 이탈리아계 사업가다.
지금 이런 일에 한국인들이 도전장을 내기엔 영국의 시스템에 익숙지 않고 기반이 턱없이 허약한 상태로 보인다. 영국인들은 둘이서 무인도에 갇혀도 중간에 소개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절대로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아무리 '하면 된다' 정신으로 달려든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런던에 주재하지 않는 한국 공공기관들이 한류 관련 행사를 직접 하거나 지원하기도 했지만 역시 시스템 이해와 인프라 부족으로 인해 엉성하게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전시 관람객은 몇몇 부스는 통관 문제인지 샘플 없이 사진만 갖다뒀더라고 전했다.
그래도 차분히 준비하면 몇 년 후에는 K팝 등 한류 행사와 연계해서 생기는 사업 기회를 충분히 활용할 역량은 갖출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merciel@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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