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언론 "국민 비웃나" "트럼프 수준" 맹폭
박수 받고 떠난 '롤모델' 대처 30초 사임사도 조명
(서울=연합뉴스) 김동호 기자 = 취임 44일만에 사의를 밝히며 영국 역사상 최단명 기록을 세우게 된 리즈 트러스 총리의 짤막한 사임 연설이 도마 위에 올랐다.
현지 언론은 트러스 총리가 성급한 감세 정책으로 금융시장에 큰 혼란을 불러와 놓고는 퇴장하는 과정에마저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며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20일(현지시간) 데일리메일, 미러, 유로뉴스 등 외신 매체에 따르면 트러스 총리가 이날 오후 1시 30분께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사퇴 의사를 표명하고 돌아서기까지 걸린 시간은 1분 30초에 불과했다.
"나는 경제적, 국제적으로 크게 불안정한 시기에 취임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해 "후임자가 결정될 때까지 총리직에 머물겠다, 감사하다"고 끝맺기까지 사용된 영어 단어는 201개뿐으로, 이례적으로 짤막한 사임 연설이었다.
미러는 이를 가리켜 "트러스가 퉁명스러운 성명을 남기고 총리직을 사임했다"고 꼬집었다.
트러스 총리의 표정과 제스처도 이목을 끌었다.
데일리메일은 "오늘 진이 빠지고 핼쑥해진 트러스가 정치사상 가장 기이한 사임 연설을 했다"며 "몇 주간 대중의 분노에 시달린 그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병약한 미소를 가장해 보였다"고 지적했다.
칼럼니스트 세러 바인은 "그녀의 사임 연설은 '트럼프스러운' 수준의 기능장애와 현실 부정을 드러냈다"며 "눈물도 흐르지 않았고, 입술도 떨리지 않았고, 어떤 슬픔이나 후회도 없었고, 오직 그의 특징인 당혹스러운 오만함만 있었다"고 썼다.
임기 내내 다양한 정치적 논란에 직면했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끌어들여 트러스 총리를 맹폭한 것이다.
바인은 "트러스는 마치 이 모든 것이 다소 거슬리는 불상사에 불과한듯, 아직도 웃고 있다"며 "영국 국민에게 사과 한마디 없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두고 보디랭귀지(몸짓언어) 전문가인 주디 제임스는 "트러스의 연설에는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기괴한 허세가 담겨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상처입은 동물처럼 행동했다"고 꼬집었다.
야생동물이 상처를 입고도 포식자 앞에서는 생존을 위해 짐짓 멀쩡한 척 연기하듯, 활기차게 연단까지 걸어 나오거나 연설 중간중간 입꼬리와 눈썹을 치켜올리며 희미하게 웃음 짓는 듯했던 트러스 총리의 몸짓 역시 심리적 방어기제로 인한 결과물이라는 해석이다.
반면 연설 내내 트러스 총리의 곁을 지킨 남편 휴 오리어리의 경우 마치 언제라도 부인이 쓰러지면 부축할 각오를 한 듯 경직돼 보이는 표정을 연설 내내 숨기지 못해 대조를 이뤘다는 것이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총리를 롤모델로 삼은 트러스 총리가 그의 사임 연설마저 벤치마킹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보수당을 연속 세 번이나 총선 승리로 이끌며 성공적으로 임기를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 대처 전 총리는 1990년 11월 22일 관저 앞에서 30초짜리 연설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자리에서 내려온 바 있다.
당시 대처 전 총리는 당당한 표정으로 "11년 반이라는 멋진 시간을 뒤로 하고, 다우닝가를 마지막으로 떠난다"며 "우리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보다 영국이 더 나은 상태에서 사임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고 밝혔다.
대처 전 총리의 발언이 끝나자 거리에 몰려들었던 시민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고, 일부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유로뉴스는 "트러스는 공개적으로 대처의 팬을 자처했다"며 "재임 기간은 자신의 우상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사임 연설만큼은 그에게서 영감을 받았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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