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안정특별대출, 통화정책 기조와 상충…영국 상황과 '닮은 꼴'
이창용 총재 "시장 안정방안은 미시 조치…통화정책 전제조건 바뀐 것 아니다"
유동성 직접공급 없는 적격담보증권 확대는 허용 가능성
(서울=연합뉴스) 신호경 박대한 민선희 기자 = 채권시장을 중심으로 '돈줄이 말랐다'는 아우성이 커지자 지난해 8월 이후 1년 넘게 기준금리를 계속 올리며 돈줄을 조여온 한국은행이 고민에 빠졌다.
금융위기 이후 최대 수준의 인플레이션(물가상승) 압력을 낮추려면 기준금리 인상과 시중 유동성 축소 기조를 이어가야 하지만, 자금 경색이 더 심각해지면 한은도 금융시장 안정성 등을 고려해 인상 폭과 속도를 조절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더구나 당장 은행권의 적격담보증권 확대, 금융투자협회의 금융안정특별대출 요청 등에도 답해야 하는데, 직접 유동성 공급 없이 '핀셋' 지원이 가능한 적격담보대출 확대는 허용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하지만 금융안정특별대출의 경우 한은이 대출을 통해 유동성을 늘린다는 점에서 통화정책방향과 상충하는 만큼 결단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 유동성 줄여야 하는데…특별대출 요청받은 한은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나재철 금융투자협회장은 지난 18일 이창용 한은 총재를 만나 회사채 시장의 유동성 경색 등에 대한 해법으로 '금융안정특별대출 제도' 재가동을 요청했다.
금융안정특별대출 제도는 일반기업이나 증권사·보험사·은행 등 금융회사로부터 한은이 우량 회사채(AA- 이상)를 담보로 받고 대출해주는 방식으로, 비상시 유동성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장치다.
앞서 한은은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이 시작되자 2020년 5월 이 제도를 처음 신설한 뒤 3개월씩 두 차례 연장을 거쳐 지난해 2월 3일 종료했다.
당시 제도를 마치면서 한은은 "향후 금융시장이 다시 불안해지면 이 제도의 운용 재개를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은 안팎에서는 현재 통화정책 기조 등을 고려할 때 한은이 쉽게 재개를 결정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2020년 첫 가동 당시에는 코로나19의 경기 충격을 막기 위해 기업과 가계에 적극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하는 시기였고,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코로나19 여파 등으로 -0.3%(2020년 5월)까지 추락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에 대한 부담도 없었다.
하지만 최근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대 중후반(8월 5.7%·9월 5.6%)에 이르고, 뛰는 물가를 잡기 위해 한은 총재가 "국민의 고통을 알지만, 경제손실을 금리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호소하며 7·10월 사상 처음 두 차례의 빅 스텝(기준금리 0.50%포인트 인상)까지 단행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안정특별대출 제도를 재가동하는 것은 한은의 통화정책 기조와 분명히 부딪치는 측면이 있다.
한쪽에선 물길을 막는 둑을 쌓으면서 다른 한쪽에선 물길을 터주는 격이다.
한은 관계자는 "금투협 등의 요청을 알고 있고,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만큼 상황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이날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 참석한 뒤 금융안정특별대출 관련 질문을 받고 "오늘 대책에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나 다른 방안(금융안정특별대출)은 빠졌는데, 이번 방안들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과 국제금융시장 변동성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필요하면 금통위원회에서 다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며 신중하게 답했다.
◇ 영국 중앙은행, 금리 올리면서 채권 사들이고…정부 감세정책과도 엇박자
한은의 딜레마는 본질적으로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BOE)의 고민과도 닮았다.
지난달 말 영국 정부가 430억 파운드(약 69조원) 규모의 감세안을 발표하자 파운드화 가치는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국채 금리가 급등(국채 가격 급락)했다.
이에 따라 국채를 담보로 하는 파생상품에 투자한 연기금들이 담보 가치 하락으로 보유 자산을 대거 투매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고, 결국 BOE가 채권시장 안정을 위해 이달 14일까지 시한을 정해놓고 650억 파운드(약 102조원) 규모의 긴급 국채 매입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앤드루 베일리 BOE총재는 최근 국제통화기금(IMF) 행사에서 "물가 목표 달성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고까지 말했지만, 채권시장이 붕괴할 조짐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오히려 돈을 푸는 국채 매입에 나선 것이다.
더구나 중앙은행이 물가를 억제하기 위해 긴축하고 있는데, 영국 정부가 재정 지출을 늘리고 감세를 추진하는 자체도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심각한 '엇박자'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 자금경색 이어지면 11월 빅스텝 가능성↓
다만 은행권이 한은에 바라는 적격담보증권 확대 조치의 경우 조만간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회의를 열어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은행들은 현재 한은으로부터 대출할 때 국채·통화안정화증권·정부보증채 등 국공채만을 담보(적격담보증권)로 제공하는데, 이 적격담보증권에 은행채도 포함해달라는 게 은행들의 요청이다.
관철되면 은행 입장에서는 이미 보유한 은행채를 대출 담보로 활용할 수 있어 그만큼 자금 여력이 늘고 조달 압박을 덜 받게 된다. 한은은 앞서 2020년 3월 코로나19 사태를 고려해 은행채 등도 적격담보증권으로 인정했다가 지난해 3월 말 한시적 조치를 종료한 바 있다.
한 경제전문가는 "적격담보증권 확대는 한은이 직접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식이 아닌 만큼 통화정책과 크게 충돌하지 않는다"며 "더구나 한은도 자금시장 경색을 오래 방치할 경우 전체 금융시스템이 입을 타격을 걱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핀셋 조치로서 적격담보증권 확대 정도는 재개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한은 관계자는 "금융시장은 통화정책의 중요한 경로이고, 파급 경로가 망가지면 아무리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통화정책을 펼쳐도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며 "따라서 돈이 원활하게 돌도록 한은이 할 수 있는 일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도 이날 "한은이 적격담보증권 대상에 국채 외 은행채와 공공기관채를 포함시키는 방안을 이번 주 금통위에서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총재는 오는 26일 시중 은행장들(은행연합회 이사진)과 만찬 회동을 할 예정인데, 이 자리에서도 은행들은 이 방안을 포함해 기업 등에 자금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한 한은의 역할을 주문할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여러 조치로도 자금 경색 상황이 앞으로 더 나빠진다면, 금통위의 11월 통화정책 결정 과정에서 이 사태가 중요한 변수로 떠오를 가능성도 있다.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인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원/달러 환율 때문에 기준금리 추가 인상은 불가피하겠지만, 채권 시장 충격 등을 고려할 때 현재 시장의 예상과 달리 세 번째 빅 스텝을 선뜻 밟기가 어려워질 전망이다.
이 총재는 최근 자금경색 사태가 통화정책 기조에 미칠 영향에 대해 "자금시장 안정 방안은 최근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중심으로 신용 경계감이 높아진 데 대한 미시 조치라서, 거시 통화정책 운영에 관한 전제조건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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