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강진욱 기자 = 러시아 당국의 징집령 이후 지중해 외딴 섬 사이프러스가 IT 분야 종사자 등 고학력 러시아인의 이주 선호지로 부각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2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지난달 2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0만 명 징집령'을 내린 뒤 러시아인 수십만명이 인근 조지아와 카자흐스탄 등지로 피신한 것으로 전해졌다.
징집령 직후엔 유럽연합(EU) 국가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솅겐 비자'를 갖고 있던 소수의 젊은이가 이웃나라 핀란드나 노르웨이로 출국해 다른 유럽 국가로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로선 EU 회원국들이 러시아인에 대해선 솅겐 비자를 발급하지 않고, 입국 수속 절차도 강화해 러시아 남성들이 갈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
카자흐스탄은 이미 포화상태고, 튀르키예도 최근에는 이민 희망자들에게 은행 계좌 개설 등 까다로운 조건을 붙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프러스는 러시아 당국의 동원령을 피해 조국을 떠난 이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피난처로 떠오르고 있다고 WP는 전했다.
EU 회원국 중 가장 동쪽에 있는 사이프러스는 이민 수속이 덜 까다롭고 세율도 낮은데다, 되도록 많은 외국 기업인을 유치하기 위한 개방 정책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지중해 섬나라 특유의 햇빛 가득한 아름다운 해변까지 갖춰 오래전부터 러시아 부호들과 기업들이 선망하는 곳이었다.
이 때문에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부터 일찌감치 러시아의 중산층 이상 고학력자들이 사이프러스에 몰려들었고 동원령 이후 더욱 이주자가 늘고 있는데, 특히 이들 중에는 IT 인력들이 최근 새로운 이민 물결을 이룰 정도로 많다고 WP는 전했다.
2014년 이곳에 와 '사이프러스(CypRus)_IT'라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든 올레그 레셰트니코프는 "사이프러스는 러시아인에 대한 이민 정책을 바꿀 기미가 없다"며 "이곳은 최고 이민처 중 한 곳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2월 개전 이후 최고 5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어 사용자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사이프러스로 이주했다고 전했다.
이곳에 온 러시아인 대다수는 '지중해의 모스크바' 또는 '리마솔그라드'로 불리는 키프로스 남부 항구도시 리마솔에 몰려들고 있다.
리마솔에는 이미 거대한 러시안 커뮤니티가 형성돼 자국어로 소통할 수 있고, 법조인과 부동산 업자, 가정부, 심지어 네일 아티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군이 이주해 생업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올봄 개전 이후부터 이미 이주민이 급증하면서 부동산 붐이 일고 렌터카 회사들은 수요를 감당하느라 애를 먹고 있으며, 학부모들은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키려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WP는 전했다.
여름에 왔거나 징집령 이후 새로운 이민 물결을 타고 온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라르나카 해변가나 니코시아 등 인기가 덜한 곳에 정착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4월에 이곳에 왔다는 예프게냐 코르니이바(28)는 "내가 처음 왔을 때부터 이미 집 문제가 심각했다"며 "최근 집값은 두 배로 올랐고, 누가 웹사이트에 임대를 내놓으면 불과 몇 시간 만에 사라진다"고 말했다.
게임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그녀는 또 "사이프러스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리마솔에서는 월세 2천 유로(약 283만 원) 이하로 침실 2개짜리 아파트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뒤 사이프러스에 본사를 둔 회사가 자신의 이주를 지원해줬고 필요한 서류 작업도 대부분 대행해줬다고 전했다.
그러나 갑자기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진데다, 당장 러시아를 떠나올 수 없었던 애인도 없이 홀로 낯선 곳에 정착하느라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었다고 실토했다.
러시아 정부는 고급 기술인력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부동산 저리 대출에 이어 최근에는 군 복무 면제 등 각종 유인책을 쓰고 있으나, 대부분 고급 인력은 러시아에 남아 있다가 전란에 휩쓸릴 것을 우려해 정부의 유인책은 실패하고 있다고 WP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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