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요금·식자재 가격 급등…물가 정체 익숙해 상승 체감도 높아
지출 줄이는 일본 사람들…외국인 노동자는 '울상'·여행자는 '미소'
(도쿄=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 "수입 치즈가 500엔(약 4천800원)에서 최근에 700엔(약 6천700엔)으로 올랐어요. 밀가루도 그렇고, 외국에서 들여오는 식자재 값이 전반적으로 상당히 뛰었습니다."
직장인들을 겨냥한 식당이 밀집한 도쿄 미나토구 신바시(新橋)의 술집에서 일하는 젊은 남성은 27일 "음식 판매가를 2년 전과 동일하게 유지하고 있는데, 물가가 더 오르면 사장이 가격 인상 여부를 고민할 듯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신바시의 카레 음식점에서 일하는 사토 리키 씨도 고깃값을 비롯한 식자재 가격이 오르고 있다면서 "물가 상승에 어떻게든 버틸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이 가게는 물가 상승에 따른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지난달 모든 품목을 80엔(약 770원) 정도씩 올렸다. 인상액이 많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카레 한 그릇이 통상 1천 엔(약 9천700원)을 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인상률은 낮지 않은 편이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전기요금도 많이 올랐다"며 "물가가 계속 상승하면 음식 가격을 또 인상하거나 양을 줄여야 한다"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날 방문한 신바시의 다른 음식점 직원도 이례적인 물가 상승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른바 '거품(버블) 경제' 이후 30년 넘게 물가가 거의 오르지 않았던 일본에서 물가가 눈에 띄게 상승하고 있다.
주된 요인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진행된 엔화 가치 하락(엔저)이다.
올해 초 달러당 115엔 안팎이던 엔·달러 환율은 이달 들어 32년 만에 달러당 150엔을 돌파했다. 특히 엔저의 영향이 큰 부문이 전기·가스 같은 에너지와 식자재다. 모두 자급률이 낮아 일본이 오랫동안 수입에 의존했던 분야다.
원자재를 수입해 상품을 만드는 일본 기업들은 엔저에 따른 비용 증가를 가격 인상으로 상쇄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의 9월 소비자물가(신선식품 제외)는 작년 동월 대비 3.0% 상승했다. 소비세율 증가분이 반영된 2014년 4월을 제외하면 1991년 8월 이후 31년 만에 최고치였다.
도쿄 23구(區)의 10월 소비자물가도 작년 동월 대비 3.4% 올라 사실상 40년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지난달 한국의 소비자물가가 5.6% 오른 점을 감안하면 일본의 물가 상승률은 높지 않지만, 정체된 물가에 익숙한 일본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체감도가 큰 편이다.
이에 일본 정부는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각 가정에 전기·가스 요금을 지원할 방침이지만,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품의 가격은 계속 뛰고 있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외식 체인점인 '미스터도넛'과 '교자노오쇼'는 올해 들어 두 번째로 일부 품목 가격을 올릴 방침이다. 도쿄도 23구·무사시노시·미타카시의 택시 기본요금은 내달 14일부터 420엔(약 4천원)에서 500엔(약 4천800원)으로 오른다.
일본 소비자들은 이 같은 물가 상승에 지출을 줄이고, 절약하는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다.
도쿄 스기나미구에 거주하는 27세 여성 오구라 하루카 씨는 "수입산 강아지 사료를 온라인에서 구매할 때 무료 배송 금액이 과거에는 2천 엔 이상이었는데 지금은 5천 엔 이상으로 바뀌었다"며 "물가가 오르면 절약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일본의 맥주류 판매량은 작년 동월 대비 약 50%나 늘었다. 이에 대해 지난해에 코로나19로 모임이 많지 않았던 영향도 있지만, 맥주 회사들이 이달 1일부터 일제히 가격을 올리겠다고 밝히자 '사재기'를 한 결과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지출 감소와 관련해 일본에서는 중고 전자제품 매장이 인기를 끌고, 식비를 아끼는 다양한 방법도 소개되고 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에서 중고 가전제품 시장 규모는 신제품 가격 인상과 반도체 부족 등으로 5년 전보다 60% 성장했다. 괜찮은 제품을 신상품의 절반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어서 반응이 좋다는 것이다.
도쿄신문은 "베란다에서 채소를 기르고, 기름 사용량을 줄이면 식비 절약에 도움이 된다"며 온라인에서 필요한 물품만 장보기,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쿠폰 활용하기 등을 생활비 줄이는 법으로 제시했다.
엔저는 일본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많은 임금을 기대하며 일본에 입국한 개발도상국 노동자들은 본국으로 송금하는 금액이 크게 줄어드는 상황에 직면했다.
도쿄 아사쿠사 인근 편의점에서 근무하는 인도인은 29일 "엔화 가치가 떨어져 힘들다"며 "엔저가 끝날 때까지 당분간은 가족에게 돈을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외국인들이 일본을 여행하기에는 좋은 환경이 됐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정부가 방역 대책을 완화하고 엔·달러 환율이 상승하면서 일본항공과 전일본공수의 일본행 국제선 예약이 외국인 입국 제한을 시행했을 때보다 약 3∼5배 늘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일본 여행 수요가 많은 동남아시아, 대만, 홍콩 등지와 일본을 잇는 항공편이 속속 늘어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항공편도 증가 추세다. 김포공항과 하네다공항을 잇는 노선의 운항 횟수는 30일부터 기존 주 28회에서 주 56회로 두 배가 된다.
이와 관련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28일 종합경제대책을 발표하면서 엔저 상황을 살려 일본 각지의 매력을 세계에 알리는 '관광 재시동'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여행 목적으로 일본을 찾은 외국인의 연간 소비액을 5조 엔(약 48조원)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그러나 엔저로 인해 관광 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외국인 인력을 충원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점이 목표 실현의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취재 보조: 무라타 사키코 통신원)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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