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제사용 자제 공언 거부…'핵 언급' 그 자체로 위협 효과
우크라 "허세 맞다" vs 전문가 "사용 가능성 작아도 배제못해"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7일(현지시간) 러시아 전국에 방영된 TV방송에서 핵무기에 관한 언급을 함에 따라 의도와 실현 가능성에 관심이 쏠린다.
그는 이날 러시아의 '시민사회 및 인권 발전을 위한 대통령 자문회의'(러시아 인권위원회) 연례 회의에서 "핵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며 "우리는 가장 앞선 핵무기들을 갖고 있지만 이를 면도기처럼 휘두르고 싶진 않다"고 했다.
또 "러시아는 미치지 않았다. 우리는 핵무기 사용을 언급한 적 없다"며 서방이 핵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푸틴은 '특별 군사작전'이라는 명목으로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한 2월 하순 이래 전쟁의 주요 고비마다 핵무기에 관한 얘기를 꺼내거나 이를 연상케 하는 발언을 해 왔다.
특히 여름에 우크라이나 측의 반격이 본격화되면서 러시아에 전황이 불리해지기 시작한 이래 푸틴의 핵 언급 발언이 더욱 잦아지고 있다.
푸틴은 9월 21일 동원령을 내릴 때 서방 측이 러시아를 핵으로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수단을 쓸 수 있다"며 "엄포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어 9월 30일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 4개 주를 '합병'한다는 '조약'을 체결하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우리 땅을 지킬 것"이라고 말하면서 미국이 이미 일본에 두 차례 핵무기를 쓴 적이 있다는 전례를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푸틴의 발언은 점령지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영토 방위 수단으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분위기를 풍기려는 의도로 관측됐다.
푸틴은 10월 27일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핵무기를 쓸 필요가 없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필요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당시 푸틴은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위협한 적이 전혀 없다며 다만 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 등 서방 국가 지도자들의 협박에 대응해서 발언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트러스 전 총리는 8월 23일 당내 경선 과정에서 '총리가 되면 핵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를 각오가 돼 있느냐'는 취지의 질문을 받고 "총리의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하며, 나는 각오가 되어 있다"고 답했다.
푸틴의 발언들을 액면 그대로만 놓고 보면 마치 노골적 협박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러시아가 핵무기 보유량 세계 1·2위를 다투는 나라임을 감안하면 푸틴이 '핵'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우크라이나나 서방에는 협박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실제 핵무기 사용을 준비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 같은 협박 효과를 노리고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인지를 두고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푸틴은 이번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계획은 현재로서는 전혀 없다는 입장을 수차례에 걸쳐 밝혀 왔으나, 어떤 상황에서도 사용하지 않겠다거나 선제적 핵무기 사용을 하지 않겠다는 확언은 한 적이 없다.
이번 러시아 인권위원회 회의에서 한 위원이 "선의의 표현으로, '러시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공언할 생각은 없느냐'고 푸틴에게 질문했으나, 푸틴은 확언을 단호히 거부했다.
타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푸틴은 "만약 어떠한 상황에서도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는 않겠다고 해 버리면 두번째로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며 "우리 영토에 (먼저) 핵 공격을 당하면 우리가 (핵무기를 반격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확률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런 푸틴의 태도는 러시아가 그간 공식적으로 천명해 온 '핵무기 사용 원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러시아는 대외적으로 "핵무기는 대량살상무기가 동원된 공격이나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는 재래식 무기가 동원된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즉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을 받는' 경우에는 핵무기를 상대편보다 먼저 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뒀다.
푸틴의 거듭된 핵무기 언급이 실질적인 '핵 협박'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운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푸틴이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할 가능성은 작다는 의견을 지난달 말에 밝혔다.
그는 11월 30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가 뉴욕에서 주최한 '딜북 서밋' 콘퍼런스에서 방영된 영상 연설에서 "다시 한번 말하지만 푸틴은 러시아 국민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고 살아남길 원한다"며 "따라서 내 사견으로 그가 핵무기를 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젤렌스키는 9월 말에는 러시아의 핵무기 사용을 전 세계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위험은 항상 있다"며 실제 사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할 확률이 높지는 않지만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러시아의 전황이 매우 불리해져서 푸틴이 승전을 위해 과감한 도박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할 경우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술핵 사용을 감행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미국 국방정책 싱크탱크 '신미국안보센터'(CNAS)의 리처드 폰테인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9일 미국의 외교전문매체 '포린 폴리시'(FP)의 '주장' 코너에 실은 기고문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태 , 핵전쟁은 오늘날 가능하다. 설령 확률은 낮다고 하더라도"라는 말로 상황을 요약했다.
미국 싱크탱크인 유라시아 그룹과 지제로 미디어의 사장인 이언 브레머는 지난달 18일 닛케이 아시아의 의견 코너에 실은 기고문에서 "(러시아가 핵무기를 사용할) 위험은 작지만, 중대한 문제임을 감안했을 때 아주 작지는 않다"고 말했다.
limhwaso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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