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500년간 세계 균형자…공백 생기면 무력분쟁 기승"
"'유럽문화 자살' 재발안돼…종전 협상할 시점 다가온다"
(서울=연합뉴스) 유한주 기자 = 국제정치 이론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헨리 키신저(99)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력을 크게 잃으면 세계 전체에 악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16일(현지시간) 미국 뉴스위크에 따르면 키신저 전 장관은 영국 주간지 더 스펙테이터 최신 호에 실린 '또 다른 세계 대전을 피하는 방법' 제하 에세이에서 "일부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무능해지기를 바라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러시아가 폭력적 성향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500년 이상 세계의 조화와 힘의 균형을 맞추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해왔다"며 "러시아의 역사적 역할이 저평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좌절을 겪더라도 지배적인 핵무기 보유국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핵무기를 비롯한 러시아의 역량이 꺾이거나 러시아 정권이 무너질 경우에 세계에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러시아의 엄청나게 넓은 영토 자체가 다툼이 이뤄지는 (권력) 공백상태가 될 수 있다"며 "경쟁하는 집단들이 분쟁을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할 수 있고 다른 국가들이 무력을 앞세워 권한을 확대하려고 할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제1차 세계대전에 비유하면서 종전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우드로 윌슨 전 미국 대통령이 평화를 위한 노력을 대선 이후로 미루면서 전쟁이 2년 길어져 200만 명이 추가로 사망했고 유럽의 균형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1차 대전은 유럽의 탁월함을 파괴한 일종의 문화적 자살이었다"며 러시아에 같은 일이 발생해 세계질서가 뒤집어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앞서 키신저 전 장관은 한 경제포럼에 참석해 러시아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크라이나가 영토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서방진영에서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에 "지금이 1938년인가"라고 비판하면서 키신저 전 장관의 주장을 뮌헨 협정에 비유한 바 있다.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4개국은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일부를 독일에 넘기는 대신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보장한다는 뮌헨 협정을 체결했다.
독일 나치 정권을 이끈 제국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다음 해에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한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 같은 지적과 관련, 키신저 전 장관은 자신이 종전을 원하는 것은 맞지만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편에 서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고 항변했다.
그는 "나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막아 세우려는 동맹군의 노력에 지지를 반복해서 표명해왔다"라면서 "하지만 이제는 이미 성취된 전략적 변화를 토대로 구축하고 이를 협상을 통해 평화를 달성하는 데 이용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진단했다.
hanj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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