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서 탄핵 반대·평화 촉구 시위…"시민 20명 넘게 죽었다" 일부 격앙
국가 비상사태 속 경찰학교생까지 동원…시위대 앞에서 앳된 얼굴로 '국가제창'
의회, 조기 대선안 부결시켜…볼루아르테 내각, 장관 줄사퇴 '흔들'
(리마=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 16일(현지시간) 혼돈의 페루 수도 리마 한복판 산마르틴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앳된 얼굴의 경찰학교생들이었다.
광장 계단참에 줄을 맞춰 선 100여명의 학생은 모두 여성이었는데, 잔뜩 긴장한 듯한 모습으로 정면을 응시하다 누군가의 선창에 맞춰 페루 국가를 힘차게 불렀다. 그들 앞에는 페루 국기를 손에 높여 치켜든 채 정부와 의회에 대한 성토를 쏟아내는 시위대가 있었다.
경찰 방패를 들고 학생들 앞에 서 있던 현직 경찰 몇몇은 시위대의 휴대전화 촬영 세례가 부담스러웠는지 조용히 자리를 떴다. 일부 시민은 그 뒤에서 야유와 조소를 보내다 다시 정부를 힐난하는 거친 구호를 외쳤다.
지난 7일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연일 격한 시위로 소용돌이치는 페루 도심 곳곳은 일상의 평온함을 잊은 지 오래다.
대통령궁과 의회, 대법원 등이 밀집한 리마 센트로(중심부) 산마르틴광장 주변은 특히 정치권에서 촉발된 사회 갈등의 단면을 여실히 볼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다.
대통령궁 인근 식당에서 일하는 로사 마리아(23)씨는 "(카스티요) 탄핵 이후 이곳에서는 거의 매일 같이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며 영업에 지장을 줄 만큼 악영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가시 돋친 외침을 계속 듣다 보면 "우울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주말을 앞둔 이 날도 광장으로 통하는 도로 곳곳에서는 반란 및 음모 혐의로 18개월 구금 결정을 받은 카스티요 전 대통령의 석방·조기 선거·개헌과 현 정부 퇴진·평화를 촉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지난 14일 페루 정부의 국가 비상사태 선포 이후 군대가 경찰과 함께 시위 질서유지의 한 축을 맡게 되면서 도심에는 육군 장갑차까지 등장했다.
경찰 역시 기마대까지 호출하는 등 돌발상황 대처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리마 외곽 산후안데 루리간초에 산다는 카르멘 아길레라 씨는 '국민들은 평화를 원한다'는 걸개를 품은 채 40분가량 도심을 걸었다고 했다.
그는 "시위를 하다 벌써 20명 넘게 숨졌다"며 "나를 포함해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평범하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는데, 왜 우리를 이곳에 불러 모으느냐"고 정부와 의회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페루를 위해'라는 뜻의 글씨를 인쇄한 머리띠를 이마에 두른 채 시위에 참여한 한 대학생(22)은 "정부와 의회 모두 싫다"며 "투표로 선출한 대통령을 의원들이 언제든 축출할 수 있는 현 제도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뜯어고쳐야 한다"고 거들었다.
주요 도로 봉쇄와 공항 폐쇄 등 격한 시위 양상은 이날도 전국 곳곳에서 계속됐다. 페루 당국은 대통령 탄핵 사태 열흘째인 이날까지 시위와 관련해 숨진 인원이 최소 22명이라고 밝혔다.
카스티요 전 대통령 지지자들로 주를 이룬 시위대는 특히 디나 볼루아르테 정부에서 제출한 개헌안을 이날 의회에서 부결한 것에 대해 분통을 터트렸다.
조기 대선은 볼루아르테 대통령이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 탄핵에 반발하는 시위대 요구를 일부 수용해 추진한 사안으로, 애초 2026년에 치러질 예정인 대선과 총선을 내년 12월로 2년 이상 앞당겨 치르자는 내용이 담겼다.
설상가상으로 파트리시아 코레아 교육장관에 이어 자이르 페레스 문화장관이 잇따라 직에서 물러나는 등 카스티요 전 대통령 탄핵 이후 '급조된' 볼루아르테 정부는 사면초가에 몰리는 형국이 연출되고 있다.
'빛의 길로 가려면 제헌의회뿐'이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던 한 시민은 "의원들이 총사퇴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길이 멀면, 편한 슬리퍼조차 불편하게 느껴진다'는 페루 속담을 전하며 난국을 헤쳐갈 지름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wald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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