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 도심 곳곳 정치 문구 그라피티…정부·의회·법원·언론 싸그리 비판
일부 시위대 "나도 카스티요 싫어…그런데 나머지 권력층 더 싫다"
(리마=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 페루 정부의 국가 비상사태 선포 이후 첫 주말인 18일(현지시간) 한낮 수도 리마 중심부 대통령궁과 의회, 대법원 주변은 춤과 음악 열기로 가득했다.
동호회 또는 종교단체를 매개로 모인 이들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박자의 노래에 맞춰 스트레스를 풀었다. 인근 잔디밭에는 삼삼오오 망중한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이 쉽게 눈에 띄었다.
당장 전날 밤까지도 과격한 정치 구호가 난무했던 그 광장과 거리가 맞나 싶을 정도의 어색한 평온함은 곳곳에서 묻어났다.
리마 시민들은 그러나 "분명히 평소와 다른 일요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 뒤편 바리케이드 너머 총기를 들고 주변을 살피는 군인과 경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학생 미리암 산체스 씨는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라며 "주말에는 좀 여유로워지고 싶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고 말했다.
지난 주말까지의 리마와 달라진 것은 또 있었다. 사람들 눈에 잘 들어오는 건물 벽면이 격정적인 정치 문구를 볼 수 있는 '대자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라우 광장·마요르 광장 일대와 파세오 데라 레푸블리카대로 등 3시간가량을 걸으며 살펴본 시내 주요 지역에는 거의 예외 없이 정부와 의회, 법원, 언론을 비판하는 글들이 넘쳐났다.
'디나(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는 암살자', '의회 해산', '새로운 헌법', 'TV를 켜서 불을 지르자'는 등 문구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피 흘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혁명을 말해선 안 돼'라는 붉은 글씨의 문구도 제법 많았다.
인근 벤치에 있던 페루 북부 피우라 출신 페드로(48)씨는 "나도 (탄핵당한) 페드로 카스티요(전 대통령)를 싫어한다"면서도 "그런데 나머지 권력층은 더 싫어서 어제 리마에 온 겸 밤에 집회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골 마을 시위 진압을 빌미로 한 정부의 강경 대응에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쿠스코와 아레키파 등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시위대 20여명이 숨진 것을 강하게 성토한 그는 "이 나라 지도층들이 나 같은 일반 국민을 무시하다 못해 값싼(barato·스페인어, 저급하다는 뜻도 있음) 사람 취급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울분을 토했다.
페드로 씨의 항변은 실제 전날 밤 리마 볼로녜시 광장에서 진행된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 석방 요구 시위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주장이었다.
'밤에는 외국인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는 말과 함께 한동안 동행해 준 호세 호아킨(64)씨는 "카스티요 전 대통령은 부패 의혹도 있고 결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적어도 우리 같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며 일용직인 자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호아킨 씨는 "이 나라 엘리트들이 농민의 아들을 제거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시위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며 조기 선거를 통한 새 대통령·의원 선출은 다수 국민의 요구사항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페루의 권위 있는 여론조사 기관 IEP가 국민 1천216명을 대상으로 진행해 전날 홈페이지에 공개한 설문 결과(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오차 ±2.8%포인트)에 따르면 응답자 71%가 볼루아르테 대통령 취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기 선거 필요성에 대한 질문에는 83%가 압도적으로 '예스'라고 답했다.
리마의 우버 운전자 로베르토(27)씨는 "의회 탄핵은 엘리트들이 우리 민초를 거부한 것과 다름없다"라며 "이건 좌파, 우파 같은 논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 자신의 지인이 직접 벽면에 페인트로 썼다는 문구 하나를 소개했다.
직접 가 본 그곳에는 '엘리트를 파괴하라'라고 적혀 있었다.
wald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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