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총리, 푸틴에 서방 가치 권장…러, 뒤에선 다른 행동"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집권 초기인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확장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영국에 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AFP통신과 BBC 방송 등 영국 언론은 29일(현지시간) 이 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2000∼2002년의 영국 정부 문건들이 영국 국가기록원에서 새로 공개됐다고 보도했다.
2001년 1월 영국 총리실에서 오간 메모를 보면, 푸틴 대통령은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에게 자신이 반(反)나토로 보이기를 원하지 않으며 나토 확장 속도를 늦추려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한 블레어 총리는 푸틴 대통령에게 서구적 가치와 경제모델을 채택하도록 유도하고 그를 국제사회의 '주요 위치'(top table)로 끌어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블레어는 당시 취임 직후였던 딕 체니 미국 부통령과 회동에서 푸틴 대통령을 "러시아 애국자"라고 지칭했으며, "그를 러시아의 드골(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게 부적절할 수는 있으나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블레어 총리의 보좌진은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불신했다.
푸틴 대통령이 앞에서는 '건설적'인 발언을 하지만, 막후에서 러시아 관리들은 그와 반대되는 행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나토의 빠른 확장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로 그때 이고리 세르게예프 당시 러시아 국방장관은 나토에 이는 "큰 정치적 오류"가 될 것이며 러시아가 이에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당시는 미국이 빌 클린턴 정부에서 조지 W. 부시 정부로 교체되던 시기였는데, 클린턴 전 대통령과 친밀한 것으로 유명했던 블레어 총리가 부시 대통령과 친분을 쌓으려고 서두른 정황도 이번에 공개된 문건들에 담겼다.
블레어 총리는 부시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되자마자 가장 먼저 전화한 외국 지도자였고, 도널드 럼즈펠드가 미 국방장관에 낙점됐다는 사실이 전해지자마자 "빨리 장관급에서 따라붙어야 한다"고 손 메모로 지시했다고 한다.
또 블레어 총리는 부시 대통령에게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지 물었고 부시 대통령은 이에 따뜻하게 답했으나 블레어 총리에게 '총리님'(sir)이라는 깍듯한 호칭을 계속 사용했다고 영국 언론은 전했다.
영국 정부가 2001년 9·11 테러 발생 9개월 전인 2000년 12월 알카에다 수괴 오사마 빈 라덴 처단을 지지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오사마 빈 라덴은 9·11 테러 이전에도 미 연방수사국(FBI) 수배 테러범 명단에 올라 있었다.
클린턴 당시 대통령과 만찬을 앞두고 있던 블레어 총리에게 제출된 보고 문건에는 "우리는 UBL(오사마 빈 라덴을 가리키는 약자) 타격에 전면 찬성한다"고 적혔다.
지금보다는 전반적으로 부드러웠던 서방과 중국간 관계도 이번 문건들에서 나타났다.
2001년 4월, 블레어 총리는 미국의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 충돌 사건 이후 미 승무원 석방 문제를 중재하겠다는 서한을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에게 보냈다.
부시 대통령은 나중에 블레어 총리에게 승무원 석방을 도와준 데 대한 손편지를 보내 감사 인사를 했다고 한다.
2002년 11월에는 외교정책 보좌진이 "총리님께서 물으신 영국·중국 관계의 현 상태는 간단히 말해 '대단히 좋다'는 것입니다"라며 "중국도 같은 생각입니다"라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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