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눈에 비친 우크라 전쟁…고운 그림 속엔 슬픔 가득

입력 2023-01-04 11:50  

아이들의 눈에 비친 우크라 전쟁…고운 그림 속엔 슬픔 가득
미 시카고 우크라이나 현대 미술관, 아이들 그림 전시

(서울=연합뉴스) 윤종석 기자 = 오렌지색 하늘 아래 부서진 건물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엔 비행기들이 어지러이 날고, 땅에는 'Z'자가 쓰인 탱크와 삼지창이 새겨진 탱크가 돌아다닌다.
이 그림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비극 중 하나인 마리우폴 아조우스탈 제철소 항전을 표현한 그림이다. Z자가 있는 탱크는 러시아군을, 삼지창 탱크는 우크라이나군을 뜻한다.
작가는 우크라이나의 9살짜리 소년 '로만'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로만과 같이 전쟁의 참상을 겪은 우크라이나 아이들의 그림 전시회 소식을 전했다.

시카고의 우크라이나 출신 집단 거주지에 있는 '우크라이나 현대 미술관'은 지난달부터 우크라이나 현지 아이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된 그림을 그린 아이들은 대부분 전쟁으로 인해 고향 집을 떠나 서부 도시 르비우에 머무는 피란민이다.
르비우의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나탈리아 파불루크와 그녀의 21살 딸 유스티나는 작년 2월 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보육원과 병원 등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그림을 모아 현지에서 전시해 왔다.
이 소식을 들은 미술관 측이 파불루크에게 연락해 미국 내 전시를 제의했고, 그녀는 어린이들의 작품을 서류 가방 2개에 담아 보냈다.
파불루크는 "우크라이나 아이들을 돕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다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라며 "많은 이들이 미술 테라피를 필요로 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잘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그림에는 탱크와 군인, 전투기 등의 모습이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전쟁의 참혹한 트라우마를 겪었을 터이지만 아이들의 그림은 종종 실상보다 한층 밝은 이미지로 표현돼 오히려 슬픔을 더한다.
르비우의 어린이 병원에서 만난 8살짜리 소녀 '마리아'는 부엌 테이블 위에 앉아 있는 주황색 무늬의 고양이를 그렸다고 유스티나는 전했다.
하지만 평온한 그림과 달리 마리아에게 '형제가 있느냐'고 묻자 마리아는 동생이 키이우에서 버스를 타고 나오다 폭격을 맞아 죽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10살 소녀 베로니카는 파불루크의 그림 수업에서 분홍색과 오렌지색 드레스를 예쁘게 차려입고 친구와 나란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이들의 뒤편에는 집을 한 채 그렸는데, 이 집에는 전쟁 때 죽은 자신의 친구들이 사는 곳이라고 했다.

베로니카는 전쟁으로 손가락 하나와 한쪽 눈을 잃었고 가족도 없다.
유스티나는 "이 아이들과 그림을 그릴 땐 눈물을 참기 어렵다"라며 "하지만 이들은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파불루크는 페이스북에 "어떤 사람들에겐 이 그림이 그저 아이들이 끄적인 것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가장 진솔하고 훌륭한 예술작품"이라고 적었다.
bana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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