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종전 유통기한→소비기한으로 변경…식품 더 오래 팔 수 있어
소비기한 내 식품 상하거나 먹고 탈나면 제조·유통사 책임…인과관계 입증은 소비자 몫
소비자도 식품 저장·보관에 더 신경써야…식품업체들, 아직 소비기한 크게 늘리진 않아
(서울=연합뉴스) 정성호 기자 이아미 인턴기자 = 새해부터 식품을 판매할 수 있는 기한이 종전의 '유통기한'에서 '소비기한'으로 바뀌면서 식품이 유통되는 기간이 더 길어졌다.
새로운 소비기한 표시제는 여전히 소비·섭취할 수 있는 식품이 불필요하게 폐기되는 것을 막아 환경 오염과 식량자원 낭비를 줄이자는 취지지만 유통되는 기간이 연장되면 변질된 음식을 먹게 될 공산이 더 커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그러다 보니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소비기한제가 시행되면)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 먹어서 탈이 나더라도 제조업체나 유통업체 책임이 아니게 된다"라는 글이 올라와 많은 관심을 끌기도 했다.
소비기한은 식품 등에 표시된 보관 방법을 준수할 경우 섭취해도 안전에 이상이 없는 기한을 말한다. 이와 달리 종전의 유통기한은 마트·편의점·백화점 등 유통점에서 해당 식품을 유통·판매할 수 있는 기간을 뜻한다.
대체로 소비기한은 유통기한보다 길다. 통상 유통기한은 '품질안전 한계기간'(식품에 표시된 보관 방법을 지킬 경우 소비자가 먹을 수 있는 최장 기한)의 60∼70%로 설정하고, 소비기한은 특성에 따라 식품마다 다르긴 하지만 80∼90%로 정하기 때문이다. 소비기한 표시제의 도입으로 식품을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이 짧게는 2∼3일, 길게는 2배 이상 늘어나는 셈이다.
많은 식품의 경우 유통기한이 지난 뒤에도 일정 기간은 안전하게 섭취할 수 있지만, 일부 소비자들이 이를 폐기 시점으로 인식하면서 환경 오염을 낳는다는 문제의식이 소비기한제 변경으로 이어졌다.
그럼 실제 소비기한 제도에서는 소비자가 상한 음식을 먹어 병에 걸리더라도 제조·유통업체가 책임지지 않게 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소비기한 제도에서도 식품을 둘러싼 소비자분쟁 해결 기준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 소비자가 변질된 식품으로 인한 피해 사실을 입증하면 제조·유통기업은 책임을 져야 한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소비기한인지, 유통기한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음식물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그걸 제조·판매하는 쪽에 책임이 있다"고 설명했다.
변질된 식품을 먹고 탈이 날 경우 소비자는 한국소비자원에 피해 구제를 신청할 수 있다. 부패·변질된 식료품에 대한 분쟁의 경우 소비자원은 공정거래위원회 고시인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을 근거로 새 제품으로 바꿔주거나 구매 비용을 환불해주는 선에서 해결토록 하고 있다.
변질된 식품을 섭취해 질병에 걸린 경우에는 소비자가 민사 소송을 통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다. 다만 이때 소비자는 이 식품 때문에 질병이 발생했다는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입증해야 하고, 그러면 기업은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소비자가 이런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입증하기가 쉽지는 않다고 한국소비자원은 설명했다.
따라서 소비기한제에서는 소비자가 구매한 식품을 안전하게 저장·보관하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똑같은 식품을 종전보다 더 오래 유통하게 되는 만큼 소비자가 변질된 식품을 섭취할 개연성이 더 커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도 이런 점을 인정한다. 정부는 다만 소비기한제 때문에 식품 안전성 문제로 인한 소비자 분쟁이 급격히 늘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식품 제조·유통기업 입장에선 변질 위험성이 높아지는 만큼 소비기한을 소극적으로 설정해 리스크를 줄일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식약처 강백원 대변인은 "기업체들이 (소비기한 설정에) 보수적으로 접근할 것으로 전망한다"며 "(소비자도 유통·소비할 수 있는) 기간이 늘어난 만큼 식품을 안전하게 섭취하려면 품목마다 저장과 보관, 유통 조건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또 유통 과정에 대한 관리도 더 엄격하게 할 예정이다. 식약처는 식료품 유통 때 냉장보관의 기준 온도를 현재의 영상 10도에서 5도로 강화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밀폐되지 않은 구조의 오픈형 냉장고에 문 달기 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 차원에서 소비기한 또는 유통기한을 표기하도록 규제하지는 않으면서도 냉장 식품은 5도(화씨 41도) 이하에서 보관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또 식약처는 산업계와 소비자가 참고할 수 있는 취급 가이드를 발행해 유통, 판매 과정에서의 준수사항도 안내하고 있다.
실제 식품 업체들도 발 빠르게 제품의 소비기한을 종전보다 크게 늘리고 있지는 않다. 소비기한을 연장하면 제조한 식품을 더 오래 팔 수 있는 점은 이익이지만, 이는 그만큼 식품 안전사고의 위험성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비기한제에서 식품 업체들은 원칙상 자체적으로 실험을 해 적절한 수준의 소비기한을 설정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기업은 당장 실험을 할 시간적·재정적 여력이 부족해 소비기한을 종전의 유통기한과 비슷한 수준으로 정해 표기하거나, 또는 유통기한을 그대로 소비기한으로 바꿔 표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혹시라도 품질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분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대형 식품업체 관계자는 "실질적으로 기간이 늘어나서 표기가 바뀐 제품은 아직 없다"면서 "(기간이) 많이 늘어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기간이 길어져서 품질상 클레임이 나오면 기업이 다 책임을 져야 하니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건강기능식품을 제조하는 한 중소기업 관계자도 "기존 유통기한 날짜 그대로 소비기한으로 명칭만 변경해서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식약처는 이처럼 자체 실험을 할 인적·물적 기반이 취약한 중소기업을 위해 소비기한 설정에 활용할 수 있는 식품별 '참고값'을 제시하고 있다.
참고값은 식약처가 제시하는 잠정적인 소비기한의 상한선으로, 자체 실험을 하지 않는 업체는 이보다 더 길게 소비기한을 정할 수 없다.
다만 식품 품목이 워낙 많다 보니 식약처는 참고값을 4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공개한다. 제도 시행 초기에 혼란이 예상되는 이유다.
소비기한제가 올해 초부터 시행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올해 1년간은 계도 기간으로 운영된다. 이에 따라 식품 제조기업은 권고 사항인 소비기한을 표시할 수도, 혹은 종전처럼 유통기한을 기재할 수도 있다. 다만 우유는 2031년부터 소비기한 표시가 적용된다.
또 유통업체들은 기존의 유통기한과 마찬가지로 소비기한의 마지막 날까지 해당 식품을 판매할 수 있다.
소비자 입장에선 식료품을 살 때 소비기한인지, 유통기한인지를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또 식품의 이용 기간이 길어진 만큼 제품을 구매한 뒤에도 보관온도를 더 충실히 지키는 등의 노력도 필요하다.
식약처 관계자는 "소비자가 식품의 저장·보관·유통 조건을 지키지 않아 음식이 상하게 되면 소송을 해도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소비자연맹 정지연 사무총장은 "이전에는 소비자가 유통기한 지난 것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소비기한은) 그걸 명확하게 했다는 점에서 소비자에게 장점이 있는 제도"라면서도 "엄격하게 생각해보면 생산자들에게 더 유리한 제도라고 보이기 때문에 기업이 소비기한을 설정할 때 과학적 기반에 의해서 정하고, 소비자들이 신뢰할 수 있도록 정보 제공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사무총장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조일자와 소비기한을 병기하거나, 만약 지면상의 한계가 있다면 QR 코드 등을 활용해 투명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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