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별장치 끄고 해군기지 입항해 은밀 작업…美, 남아공에 우려
(뉴욕=연합뉴스) 강건택 특파원 = 제재 대상인 러시아 상선이 지난달 남아프리카공화국 최대 해군기지에서 정체불명의 화물을 하역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상선은 러시아 정부를 위해 무기를 실어나른 혐의로 지난해 5월 미국의 제재 명단에 오른 선박이어서 이번 하역을 놓고 미 정부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WSJ에 따르면 러시아 해운사 MG-플로트가 소유한 상선 '레이디R'은 작년 12월 초순 남아공 사이먼스타운의 해군기지에 은밀히 정박해 이틀 밤 동안 몰래 하역 작업을 벌였다.
당시 남아공 전역을 강타한 정전 사태로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동식 크레인이 동원돼 무장 경비대원의 보호 아래 수많은 짐을 내리거나 싣는 장면을 찍은 사진과 목격자 증언을 입수했다고 WSJ은 전했다.
레이디R은 선박자동식별장치(AIS)와 같은 송수신 장치를 끄고 남아공 해군 예인선 2척의 안내를 받아 이 기지에 입항했다고 목격자들은 밝혔다.
인근 주민들은 대형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들이 호위차량과 함께 야간에 기지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앞서 미국은 지난해 11월 레이디R이 남아공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주남아공 미국대사관을 통해 남아공 정부에 미국의 제재 대상 선박이라는 사실을 미리 통보했으나, 아무런 답변을 받지 못했다.
하역을 마친 레이디R은 12월 9일 사이먼스타운을 떠난 뒤 송수신장치를 켜고 모잠비크, 터키 이스탄불을 거쳐 러시아로 돌아갔다.
이 상선이 어떤 화물을 옮겼는지 공식 확인된 정보는 없지만, 러시아산 탄약을 남아공에 실어날랐다는 추측이 나온다.
남아공 야당 민주동맹의 코부스 마라이스 의원은 레이디R이 러시아로부터 탄약을 수송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통상 이러한 수입 절차는 일반 상업항에서 이뤄진다고 지적했다.
군사분석·컨설팅기업 '아프리칸 디펜스 리뷰'의 대런 올리버 국장은 지난 2020년 남아공이 러시아산 탄약 48만5천 달러 상당을 수입하기로 한 계약이 뒤늦게 이행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미국 정부는 남아공 해군이 레이디R의 해군기지 입항과 하역을 허용한 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한 고위 관리가 전했다.
남아공 집권 여당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옛 소련 시절부터 러시아와 가까운 관계를 맺고,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도 중립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번 레이디R 의혹에 대해서도 남아공 측은 "미국은 남아공뿐 아니라 러시아 냄새만 나더라도 아프리카를 위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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