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법 1년] 경각심 커진 기업들…"CEO 처벌법" 불만은 여전

입력 2023-01-19 11:00   수정 2023-01-19 11:32

[중대재해법 1년] 경각심 커진 기업들…"CEO 처벌법" 불만은 여전
안전책임자 직책 앞다퉈 신설…협력사 안전관리 지원 나서기도
경영계 "법 시행 후에도 재해 안 줄어"…실효성 지적·입법보완 요구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안전한 사업장을 만드는데 인적·물적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업장에서 여러분의 안전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중대재해 없는 2023년이 될 수 있도록 전 임직원이 각별히 노력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권오갑 HD현대 회장)
"임직원 여러분을 만날 때마다 안전을 당부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되풀이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안전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근본 바탕이기도 합니다. 모든 업무에서 안전을 최우선에 둡시다."(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한 건의 중대사고는 회사 전체에 막대한 손실을 끼치며 기업의 생존에 영향을 끼칩니다. 스마트 안전기술 적용과 위험작업 관리 강화 활동을 통해 안전사고 제로화를 이뤄갑시다."(임병용 GS건설 부회장)
국내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발표한 올해 신년사를 보면 '안전'의 중요성을 강조한 언급이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오는 27일 시행 1년이 되는 중대재해처벌법은 기업들에 경영상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했지만 현장 안전관리에 한층 더 경각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 안전관리 직책·조직 신설…"기업 경각심 높아져"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주요 기업들은 앞다퉈 최고안전관리책임자(CSO)와 같은 임원급 직책을 신설하고 안전 담당 조직을 새로 만들거나 위상을 격상하는 등 대비에 나섰다. 사업장 안전이 다른 조직관리의 부수적 차원을 넘어 기업 리스크 관리의 핵심 요소로 자리잡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다만 이는 산업재해로 사망자가 나오는 등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까지 형사처벌할 수 있게 한 법 조항을 의식한 조치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CSO에게 안전에 관한 책임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사주나 CEO 등의 처벌 가능성을 회피하려는 의도 아니냐는 해석이다.
고위험 산업으로 꼽히는 업계는 특히 긴장한 상태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맞았다. 산재사고가 잦은 건설업계는 법 시행 직전 현대산업개발(HDC)의 광주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대형 사고가 잇따른 터라 주말·공휴일 작업을 제한하는 등 현장 안전관리 강도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법 시행 이후에도 전국 사업장에서 크고 작은 인명사고는 끊이지 않았고, 그때마다 산업계는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여부와 대상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일부 기업은 사업장에서 발생한 인명사고로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수사를 받으면서 국민적 공분까지 산 끝에 안전의식을 뒤늦게 강화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SPC 계열사 공장에서 노동자가 기계에 끼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사측이 평소 작업 안전관리에 소홀했던 정황이 연이어 드러나 SPC 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등 비난이 쏟아졌다. 사고가 난 계열사 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입건됐다.
이후 SPC는 외부 전문가들을 포함한 안전경영위원회를 구성해 사업장 안전과 노동 환경, 사회적 책임과 관련한 감독·권고 기능을 맡겼다. 이달 초에는 안전경영 실천 결의 선포식을 열고 국제적 수준의 안전보건 경영체계 확립, 안전관리 조직·인력 확충 등 목표를 제시했다.


일부 대기업은 중소기업들의 사업장 안전관리 지원에 나섰다. 많은 중소기업이 협력업체로서 대기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중대재해처벌법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안전관리 역량을 갖추기에는 인력·조직상 한계가 커 관련 분야 전문가들을 보유한 대기업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중소기업중앙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5인 이상 기업 1천35개(중소기업 947개·대기업 88개)를 대상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과 관련한 인식도를 조사한 결과 중소기업의 77%가 대응 여력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전문인력 부족(47.6%), 법률 자체의 불명확성(25.2%) 등이 주된 이유로 꼽혔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해 10월 중소기업 안전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비영리 공익법인 '산업안전상생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은 안전관리 컨설팅, 위험공정 발굴 및 설비 안전진단, 안전 전문인력 양성 교육 등을 통해 중소기업이 독자적 안전관리체계를 갖추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예방보다는 처벌에 초점을 맞췄고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긴 하지만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인명사고에 대한 기업들의 경각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라며 "요즘은 시설 확충 등 현장 안전관리 예산은 적극적으로 투입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 경영계 "예방보다 처벌 중심…모호한 규정 등 개선 필요"
기업들을 대표하는 경제단체들은 현행 중대재해처벌법이 재해 예방을 통한 노동자 신체와 생명 보호라는 본질에서 벗어나 처벌을 주목적으로 삼는 법이라며 대폭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법 시행 이후 수사 사례를 분석한 결과 CSO를 둔 기업이더라도 대표이사를 안전의무 이행의 주체로 보고 주된 수사 대상으로 삼는 경향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법 시행 이후에도 재해 사망사고가 줄지 않는 것은 재해 예방이라는 애초 법 취지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다는 뜻인 만큼, 책임 주체로 CSO를 인정하고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명확히 하는 방향으로 법을 보완해야 한다고 대한상의는 주장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도 처벌 대상으로 적시된 경영 책임자 등의 범위가 모호한 점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았다. 강한 처벌을 부과하는 법인 만큼 처벌 대상이 명확해야 하며, 중대재해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모두 위임받은 CSO를 경영 책임자 범주에 명시적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게 전경련 의견이다.
아울러 하청업체 근로자를 구체적으로 지휘·감독할 위치가 아닌 원청이 그에 대한 의무까지 지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지며, 중대재해처벌법상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형사처벌과 병과되는 이중 제재여서 국내 법 체계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게 전경련이 내세우는 논리다.
정부는 각계 의견을 반영해 작년 11월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정책 초점을 사후 규제·처벌에서 기업들의 자기 규율 예방으로 전환한다는 방향을 제시했으나 경영계는 현행법의 모호한 규정과 지나친 처벌 수위를 먼저 손질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puls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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