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27억원 규모 기금 설립…상원서 법안 만장일치 통과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이탈리아 정부가 고교생들의 독일 나치 강제수용소 수학여행 경비를 지원한다.
이탈리아 상원은 18일(현지시간) '기억의 여정'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고 공영방송 라이(RAI) 뉴스가 보도했다.
이 법안은 고교생들의 독일 나치 강제수용소 수학여행 경비를 지원하기 위해 정부가 매년 200만 유로(약 27억원) 규모의 기금을 설립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하원 표결이 남았지만, 상원에서 만장일치 결과가 나온 만큼 하원에서도 무난히 통과될 것으로 관측된다.
이탈리아에선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을 부정하는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로마 소재 정치사회경제연구소의 2020 보고서에 따르면 이탈리아 국민의 15.6%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2004년 같은 조사(2.7%) 때보다 6배가량 급증한 것이다. 지난해 1월에는 이탈리아 극우 인사의 장례식에 '나치기'가 등장해 크게 논란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 법안은 자라나는 세대들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과거의 비극적인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하자는 취지로 풀이된다.
상원 표결을 앞두고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릴리아노 세그레 이탈리아 종신 상원의원이 상원 본회의장에 입장했다.
박수를 받으며 등장한 세그레 상원의원은 감동적인 연설로 법안 통과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또한 나치 수용소를 방문할 때 가져야 할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세그레 상원의원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견학을 한 네덜란드 학생들을 본 적이 있다"며 "그들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흥겨운 리듬에 맞춰서 수용소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는 학생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우슈비츠는 여행하는 곳이 아니다"라며 "침묵이 필요한 곳이며, 적절한 의상을 갖춰야 한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밀라노에서 태어난 세그레 상원의원은 13세이던 1944년 1월 아버지, 친조부모와 함께 폴란드의 유대인 강제 수용소로 끌려간 뒤 이듬해 5월 나치의 몰락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났다. 함께 수용됐던 그의 아버지와 조부모는 모두 그곳에서 학살됐다.
세그레 상원의원은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이탈리아 어린이 776명 가운데 살아남은 25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이다.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은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인종차별법을 도입한 지 80년째인 2018년 세그레를 종신 상원의원에 임명했다.
changyo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