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반정부시위 '도시 엘리트 對 농촌 원주민' 권력투쟁 양상

입력 2023-01-21 04:17  

페루 반정부시위 '도시 엘리트 對 농촌 원주민' 권력투쟁 양상
잉카수도 쿠스코·'원주민 공동체' 푸노 등서 상경투쟁…"리마 접수" 구호
농촌 출신 대통령 탄핵 맞서 "집권층 타도"…'분리 독립' 급진적 움직임도



(멕시코시티=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 과거 남미의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며 풍요로운 역사와 문화유산을 남긴 잉카 제국의 나라, 페루가 전임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극심한 사회 분열 양상 속에 크게 흔들리고 있다.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 탄핵과 구금으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는 방화와 시설물 점거 등 폭력 행위와 이에 대한 유혈 강경 진압으로 격화하면서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된 이번 사태는 집권층을 향한 원주민 후손들의 분노폭발로 이어지면서 '권력투쟁 양상'으로 치닫는 등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는 분위기다.



◇ 격렬 시위·강경진압에 부상자 속출
20일(현지시간) 페루 일간 엘코메르시오와 CNN 스페인어판, AP·로이터통신 등을 종합하면 전날 수도 리마 한복판 산마르틴 광장에서 수천명의 시민이 디나 볼루아르테 정부와 의회를 성토하고 카스티요 전 대통령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시민들은 곳곳에서 경찰과 격렬하게 대치했다. 돌멩이를 던지거나 긴 막대기를 휘두르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은 최루가스와 무장 장갑차로 대응했다.
시위가 자정 전후까지 계속된 가운데, 산마르틴 광장 근처 오래된 건물에서 큰불이 나 건물 안에 있던 28명이 대피하기도 했다. 붕괴 위험 속에 소방당국은 이튿날이 돼서야 불을 완전히 끌 수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도 도로 봉쇄와 공항 점거 시도 등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경찰 22명과 민간인 16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시위 취재에 나선 일부 기자들도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40∼50명이 사망한 페루 반정부 시위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당국은 예상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 "리마 접수하러 왔다"…농촌 지역서 '상경투쟁'
이번 시위의 주축은 리마 시민보다는 농촌 지역 주민들이라는 게 현지 언론 분석이다.
'잉카 제국' 수도였던 쿠스코와 안데스 고원 티티카카 호수 인근 푸노, 남미 최초의 스페인계 도시 피우라 등 수도에서 1천∼1천500㎞ 떨어진 곳에 사는 이들은 일찌감치 버스 등을 타고 리마에 모였다. 일부는 시위 전날 미리 도착해 광장과 공원 등지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다.
이번 시위에 '리마 접수' 또는 '리마 점령'이라는 별칭이 붙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생업을 잠시 놓고 '상경'할 정도로 주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은 "농민의 아들인 카스티요 전 대통령이 집권층 엘리트들에 의해 축출됐다"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이룬 데 따른 것이다.
카스티요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이자 노조 지도자 출신으로, 기득권보다는 서민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대통령궁에 입성한 바 있다.
인플레이션과 고용 문제, 빈곤 등으로 허덕이는 농촌 지역에 카스티요 전 대통령이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지만, 시위에 나선 시민들은 탄핵으로 그 희망이 사라졌다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지난달 리마에서 만난 일용직 호세 호아킨 씨는 연합뉴스에 "카스티요 전 대통령은 결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적어도 우리 같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며 자신의 처지를 대변해 줄 정치인으로 묘사했다. 우버 운전자 로베르토(27)씨도 "좌·우 논리가 아닌 엘리트들이 우리 민초를 거부한 것"이라고 성토했다.
페루의 경제는 지난 10년간 비교적 호황을 누렸지만, 지역 주민들은 복지와 교육 등 중앙정부로부터 차별받고 있다는 뿌리 깊은 불만을 품고 있기도 하다고 현지 매체는 전했다.
'리마 점령' 시위에 참여한 다니엘 마마니 씨는 CNN에 "우리는 매일 일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일 뿐이지만, 국가는 우리를 억압한다"며 "(집권층은) 모두 나가야 한다. 쓸모가 없다"고 비슷한 맥락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쿠스코에서 온 변호사 플로렌시아 페르난데스도 멕시코 일간지 라호르나다에 "볼루아르테는 자신을 페루 최초 여성 대통령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여성을 대표하지 못한다"며 "민주주의를 파괴한 정치 계급 때문에 페루가 내전 직전에 있다는 것을 전 세계가 알아야 한다"고 성토했다.



◇ 남부 원주민 분리 독립 움직임까지…배후에 모랄레스?
일각에서는 남부 티티카카 주변 푸노 등 아이마라 원주민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분리 독립을 시도하려는 급진 세력 움직임까지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아이마라어와 케추아어 등 고대 언어를 스페인어와 함께 공용해 쓰는 아이마라 원주민은 페루 남부와 아르헨티나 북서부, 볼리비아 서부, 칠레 북부 등 안데스산맥 주변을 근거지로 둔 소수 민족이다. 인구는 약 200만명 정도다.
구체적인 정황이 포착되지는 않았지만, 일부 시위대 구호나 깃발 등지에서 '독립'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지에서는 그 뒤에 에보 모랄레스 전 볼리비아 대통령이 있다고 분석한다. 모랄레스 전 대통령은 아이마라 원주민 출신이다.
페루 정부는 모랄레스 전 대통령 측에서 푸노에 각종 불법 무기를 지원하거나 급진 반정부 세력을 부추기는 등 페루 정치·사회 의제에 간섭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2006∼2019년까지 볼리비아 역사상 최장 집권하다 부정선거 논란 속에 사퇴한 모랄레스 전 대통령은 안데스 공동체 체계를 조직하는 데 긍정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페루 의회에서도 모랄레스 전 대통령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외교적 기피 인물)로 지정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기 위해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walde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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